자취생: 작전구상중이다. 공부 열심히 하라던 아버지의 당부는 잊은지 오래다. 어떡하지. 어제 나의 날라차기 덕분에 찌그러진 박스로 눈길이 갔다. 행복하다. 먹을게 바로 손닿을곳에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그래 그거다. 박스를 열어보았다. 아직 푸짐하게 먹을게 남아있다. 비닐 봉지에 사과한개와 귤한개를 넣었다. 아무래도 초라하다. 떡을 옮겼다. 그래도 불안하다. 바나나 한묶음을 옮겼다. 사과두개와 귤다섯개를 또 옮겼다. 켄으로 된 햄도 옮겼다. 그렇게 옮기다보니 내 박스에는 오늘 아침에 먹고 남은 고기와 김치박스밖에 없다. 그래 이정도면 되겠다. 다시 만화방으로 갔다. 이미 혜지씨는 퇴근을 했다. 만화방주인이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의 웃는 얼굴이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반반하고 밝은 모습이다. 자세히보니 나만큼 잘 생긴거 같다. 이놈이 제일 요주의 인물인거 같은 느낌이 왔다. 주고 싶지 않았지만 들고온게 상당히 무거웠다. 아저씨는 먹지말고 그녀만 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의상 조금 드시고 그녀한테도 나눠주라고 했다. 아찌는 쫌만 먹어. 아까와는 다르게 만화방에 손님이 별로 없다. 그녀도 없는데 만화책은 무슨. 인사를 하고 바로 집으로 왔다. 내일 아침은 남은 고기 구워먹으면 되지만 또 다음날부터는 굶는 생활이 되겠군. 내일 올때는 라면이나 사와야겠다. 아까 쌀아줌마가 준 박카스랑 초코파이도 괜찮던데... 그거나 사다놓을까? 만화방총각: 다시 새로운 날이 밝았다. 점심때가 되어간다. 배도 고프고 무료하다. 오늘은 소설은 많이 썼다. 만화무지하게 좋아하는 녀석이 준 떡을 먹고 있다. 조금만 먹을려고 했는데 맛있다. 자꾸 손이 간다. 인절미랑 꽃떡이랑 종류도 제법많다. 이제 점심은 안먹어도 될정도로 배가 부르다. 떡은 그래도 조금 남아 있다. 다른 접시에 깨끗하게 담았다. 얼마 안 있어 혜지씨가 출근했다.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혜지씨. 사랑스러운 여자다. 오늘도 정경이의 음반점을 가야겠다. 접시의 떡 혜지씨 친구가 주었다며 먹으라 그러고 카운트에 있는 봉지속 먹을것도 친구가 준거라며 가져가라고 했다. 혜지씨한테 만화방을 맡기고 나올려고 준비하는데, 어제처럼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음반점으로 향하다가 멀리서 달려오는 녀석을 보았다. 저녀석 언제한번 이름이 뭔지 물어봐야겠다. 백수아가씨: 만화방에 출근하니 이병씨가 내친구가 주었다며 떡을 준다. 내친구? 그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떡은 무진장 맛있다. 얼마 안있어 녀석이 들어왔다. 내가 떡먹는 모습을 보더니 대뜸 물었다. "그걸 다 먹었어요?" 저녀석 무슨말 하는거야? 어쭈 저녀석 이제는 나한테 말을 자연스레 건다. 날 언제 봤다고. 모른척 쌀쌀하게 물었다. "저기. 나 알아요?" 근데 얼굴색하나 안변하고 "모르는데요. "그러며 시간티켓을 받고 자기가 잘 앉던 자리로 가버렸다. 뭐야 저녀석? 그가 만화책을 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라면하나요!" 그 순간 만화방 모든이의 시선이 그녀석한테 집중되었었다. 자취생: 만화방에 가니 그녀가 내가 준 떡을 먹고 있다. 우리엄마 떡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드시는데.. 조금 남겨 둘걸 그랬다. 쩝쩝. 접시가 거의 비워져 있었다. 먹고 싶어서 그랬을까? 괜히 말걸고 싶어서 그랬을까? 한마디 했다. 나 알아요? 그래 잘 모른다. 그게 무슨 문제냐. 그리고 이제 그런말 너무 많이 들어서 대수롭지도 않다. 나도 한때 눈만 마주쳐도 저여자가 나한테 관심있는줄 알고 말걸든 때가 있었거든. 그때 그 말을 참 많이도 들었지. 그나저나 오늘도 늑대들 투성이다. 배가 고파 라면 나를 주문했다. 그녀가 끓여 주겠지. 왜 진작 이생각을 못했을까? '우웩. 이것도 라면이냐. 그 주인아저씨하고 막상막하다. 햐. 이렇게 라면을 못 끓이냐. 두 사람 다 내가 교육좀 시켜야겠다.' 근데 이녀석들 뭐야. 저기도 라면. 여기도 라면. 라면 주문이 쇄도한다. 아무래도 잘못 주문했나보다. 그녀가 힘들것 같다. 만화방총각: 조금 편안 맘으로 음반점 문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이 날 보더니 밝아졌다. 기뻤다. 모짜르트의 교향곡 넘버나인을 주라고 했다. 그녀의 밝게 웃는 모습이 좋았다. 옛날 그녀와 나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해보았다. 그녀가 그때가 그립다며 미소지었다. 꽤 오랜시간 이야기했다. 저녁으로 짜장면도 시켜먹었다. 더 오래 있으면 좋겠는데 혜지씨가 생각났다. 다시오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마중나온다는 걸 애써 말렸다. 만화방에 돌아오니 혜지씨가 땀을 뻘뻘흘리며 라면을 끓이고 있다. 그 옆에는 새로사온 라면박스가 놓여있었다. 라면 그릇이 만화방 테이블 이곳,저곳에 놓여있다. 모두들 먹지는 않고 이쪽만 보고 있었다. 좀 쉬라고 그러고 내가 대신 끓였다. 앞으로 6개를 더 끓여야 된단다. 휴. 혜지씨가 고생했구나. 내가 끓인 라면을 갖다 주었다. 라면 받은 놈이 인상을 찌푸린다. 카운터로 오는데 여기저기서 라면주문 취소를 했다. 이녀석들 왜그러지? 혜지씨와도 조금의 대화가 있었다. 자취생이 아니고 백수였다. 국문과를 나왔다고 하면서 지금은 집에서 놀고 있다고 했다. 쑥스러운 듯 웃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 집이 이 근처라고 했다. 그래도 갈때 어제 그녀석이 준 먹을거는 들고 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나가자, 손님들이 떼거지로 나갔다. 저 먹지도 않은 라면 치울 일이 고민이다. 가만 그녀가 국문과 출신이다? 내 소설 완성되면 같이 검토해보자고 부탁해봐야겠다. 잘되었다. 백수아가씨: 저녀석 졸라밉다. 저녀석이 라면을 주문하자마자 라면주문이 폭주했다. 다들 먹지도 않으면서 라면을 자꾸 시킨다. 에게 라면도 떨어졌네. 녀석이 라면을 다먹고 그릇을 갖다주었다. 그래도 예의는 있네. 미안하지만 라면 한박스만 사다줄래요? 부탁을 했다. 대뜸 녀석이 반격을 했다. "나. 알아요?". 이녀석봐라. 웃으며 "단골이잖아요."라며 답해주었다. 그 녀석이 돈을 받더니 쫄래쫄래 밖으로 뛰어나갔다. 예전에 본것처럼 어깨에 박스를 메고 들어왔다. 오늘은 이병씨가 다른날보다 늦다. 저녁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돌아왔다. 아직 라면을 7개나 더 끓여야한다. 그가 수고했다며 자기가 끓인다며 나보고는 집에 가라고 했다. 그래도 미안해서 지금 끓이고 있는건 마져 내가 끓였다. 나갈때 조금의 대화가 있었다. 이병씨는 경영학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그리고 취미는 글쓰기고... 그래 이렇게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거지 뭐. 집에 들어갔더니 엄마가 어딜 싸돌아다니냐고 구박을 했다. "아르바이트 구했다고 그랬잖아" 엄마께서 무슨 이시간에 하는 아르바이트냐며, "너 혹시 이상한데 취직한거 아니냐?" 의심스런 눈초리를 나한테 보냈다. 우리 엄마 왜 이러실까? 뭘 이상한 데야? 내가 뭐 술집같은데라도 나간다는 거야? 짜증을 내며 만화방에 아르바이트한다고 말할려고 하는데 우리엄마의 다음말이 이어졌다. "너? 혹시 비디오방이나 만화방같은데 취직한거 아냐? " 귀신같으신 우리 엄마. '만'자가 입에서 나오다 말았다. 오늘 얻어온 먹을거는 엄마한테 뺐겼다. 아까운 내 비상식량. 자취생: 그녀가 나한테 부탁을 했다. 기쁘다. 나의 경쟁상대들보다는 한발 앞서 가는 거 같 다. 더욱 노력해야겠다. 또 며칠 흘렀다. 자취생은 기말고사라 만화방출입이 줄었다. 만화방아저씨는 계속 정경이를 만났다. 그리고 우리의 백수아가씨는 여전히 라면 끓이느라 고생이다. 아직 라면은 맛이 없다. 만화방아저씨: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오늘 오전에 엄마가 다녀가셨다. 어떤 여자사진을 들고 와서 선한번 보라고 했다. 사진속 여자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선보기는 싫었다. 만화방 일이 이젠 제법 재밌다. 혜지씨와도 많이 가까워 졌고. 무엇보다 정경이 만나는 일이 즐겁다. 백수아가씨: 라면 끓이는게 힘들지만 만화방 아르바이트는 잘시작한거 같다. 이병씨와 많이 가까워졌다. 서로 농담도 주고 받는다. 그리고 단골 그녀석도 날 매일 즐겁게한다. 언젠가 골목에서 꼬마들 모아놓고 날라차기 시범보이는것도 보았다. 유치하지만 귀여웠다. 며칠전부터 만화방 오면 괜히 이상한 말 한마디씩 하고 갔다. 첨에는 이상한 놈처럼밖에는 안보였는데 이젠 참 재밌다. 자취생: 요즘 옛 선현들의 명언집을 애독하고 있다. 그녀한테 써먹기 위해서다. 오늘은 닐 암스트롱의 "나의 이첫걸음은 인류의 첫걸음이 될것이다."를 써먹을 것이다. 날라차기가 완숙기에 접어들었다. 동네 꼬마들이 멋있다고 그랬다. 시험기간이라 예전처럼 매일 못가는게 아쉽다. 하지만 내일은 시험이 끝이난다. 내 대학생활 마지막 시험이다. 만화방아저씨: 음반점으로 들어갈려는데 정경이가 어떤 양복입은 놈과 대화중이다. 정경이가 말을 많이하고 놈은 듣고 있다. 누굴까? 밖은 춥지만 나무뒤에서 지켜보았다. 정경이가 눈시울을 글썽거린다. 어라 저놈 뭐야?. 정경이를 품에 안았다. 또 대화가 오고간다. 정경이의 모습이 많이 밝아졌다. 그놈이 나가고 시간을 좀두고 음반점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정경인 날 반갑게 맞이했다. 아까 그녀석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느때처럼 오붓한 시간을 즐겼다. 그러나 왠지 아까 그놈 때문에 찜찜했다. 만화방에 들어왔더니. 어라 만화무지하게 좋아하던 그녀석이 라면을 끓이고 있고. 옆에서 혜지씨가 그걸 보고 있다. 둘이 친구맞나보다. 그녀석이 날보더니 머쩍한 듯 머리를 긁더니 "이렇게 하는거에요. 알았어요?" 혜지씨한테 이 말 한마디 남기고 나한테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만화방을 나가버렸다. 왠지 기분이 그렇다. 혜지씨한테 다른 날 같으면 얘기라도 좀 했을것인데 그냥 가라고 했다. 끓이던 라면 갖다주고 손을 씻더니 갈려고 했다. "방금 그학생 친구에요?"나가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아네요. 단골인데 라면 잘 끓인다기에... 내일 봐요. 안녕." 밝게 웃으며 혜지씨가 갔다. 왜그럴까? 그 답이 참 반가왔다. 정경이만 생각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혜지씨가 그 틈새로 조금씩 스며들었나보다. 밤에 만화방을 정리하고 카운터에 앉았다. 오늘 정경이를 찾아온 놈 때문에 마음이 착찹하다. 전남편이었을까? 백수아가씨: 어제.그제 단골녀석이 안왔다. 조금 기다려지네. 오늘오면 무슨 황당한 소릴할까? 이병씨는 여전히 내가오자 반가운 인사를 했다. 이병씨는 참 잘생겼다. 같이 다니면 주위의 부러움을 살만하겠다. 그와 이야기를 해보면 참 낙천적인 사람같다. 아무런 어려움없이 자란 귀공자같은 느낌이 문득문득 든다. 그런데 어딜 저렇게 매일 갈까? 그기에 비하면 그 단골녀석은 좀 초라하다. 생긴것도 봐줄만은 하지만 이병씨한텐 못미친다. 엉뚱한 소리만 한다. 근데 친근한 느낌은 이녀석한테 더 든다. 첨부터 낯익은 모습이었으니까.. 라면주문이 왔다. 만화방문앞에 '라면 남기는 사람한테는 라면을 팔지 않겠습니다.' 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난 다음부터는 라면주문이 좀 줄었다. 그래도 바쁘다.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골녀석. 날 한번 째려보고 들어오더니 카운터앞 신간 만화 책꽂이를 한손으로 내리치더니. "나의 이 첫걸음은 인류의 첫걸음이 될것이다. 닐 암스트롱." "^.^" 황당 그자체다. 뭐야? 시간표를 받아가더니 "여기 라면 하나요." 그랬다. 그래 저 녀석은 그래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라면을 남긴적이 없다. 다른 라면주문 제쳐두고 그녀석 먼저 갖다주었다. 다른 손님들이 그 녀석을 째려보았다. 그 녀석이 뭔가 안다는 듯. 주위를 돌아보며 자길 째려보는 모든이들과 눈싸움을 했다. 귀엽다. 라면을 다먹고 그릇을 들고 오더니 나도 째려본다. 뭔가 못마땅한 모양이다. 어라 이녀석 왜 카운터안으로 들어오는거야. 카운터 안쪽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는 나한테로 오더니 그릇을 그기에 설치된 싱크대에 넣었다. 그리고 "젓가락 이리줘봐요." 영문도 모르고 젓가락을 주었다. "비켜봐요." 그러더니 자기가 라면을 끓인다. 물을 좀 들어내고 라면을 다 끓였다. 그릇에 라면을 담드니 "먹어봐요?" 젓가락을 주었다. 야. 맛있네. 어떻게 같은스프 같은 면으로 끓이는데 이렇게 다르냐. "갖다주고 와요. " 왜 명령이야? 갖다주고 오니 또 하나 끓이고 있다. 그녀석 옆에 섰다. 그녀석이 설명을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들었다. "갖다주고 와요." 라면을 갖다주려고 갔는데 바로전에 갖다 준 라면이 벌써 다먹고 빈그릇이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이병씨가 왔다. 조금 어두운 분위기가 이녀석과 같이 있는 날 한참 쳐다봤다. "이제. 가세요."라며 단골녀석을 보냈다. 단골녀석이 좀 머쩍은 표정을 짓는다. 날 한번 쳐다봤다.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미안하다. 이병씨 오해하지마세요. 그냥 단골한테 라면 교습받은 거에요. 그의 어두운 표정을 보니 내 마음도 좀 그렇다. 힘내라는 의미로 최대한 밝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내방이다. 내일은 저 코트를 입고 가야겠다. 자취생: 어제 외운 대사를 멋있게 써먹었다. 좀더 긴 명언을 찾아야겠다. 오늘도 맛없는 라면을 먹었다. 이제는 한계점에 온거 같다. 못참겠다. 한계상황이 되니까. 참 자연스럽게 그녀 곁에 갈수 있었다. 그녀한테 라면교습을 해 주었다. 안좋은 소리 들을 각오로 갔는데 의외로 그녀가 순순히 나의 행동에 동참했다. 명언 써먹은게 효과가 있었나보다. 나의 경쟁상대들을 이제는 두걸음 앞서나가게 되었다. 만화방총각:내소설책을 폈다. 다시 소설이 안 써진다. 천천히 앞을 넘겨보았다. 곳곳에 정경이 이름이 보인다. 혜지씨의 이름도 적혀있다. 내 일기같이 쓰여진부분이 많다. 싫다. 자꾸 어제 정경이를 찾아왔던 그남자 생각이 난다. 또 시한편 적었다. 상당히 노골적인 시다. 오후가 되어 혜지씨가 왔다. 기분 때문에 그렇게 반가운 표정을 지어주지 못했다. 간단한 인사만 하고 나왔다. 정경이를 찾아갔다. 카운터에 그녀가 앉아 있다. 오늘도 그녀는 변함없이 반갑게 날 맞이했 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제 그놈에 대해 물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사람이었다. 그 소리가 기분나쁘게 내 맘속으로 전해져 왔다. 헤어졌으면 그만이지 왜 다시 찾아왔지? 그녀는 별 신경 안쓰고 자기가 보고싶어서 왔겠지.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답하는 그녀가 싫다. 그놈이라는 단어를 쓰며 안좋은 소릴 막했다. 내 말에 정경인 동의하는 답이 올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딱 잘라 말한 한마디를 들었다. "너. 말조심해!" 허? 요즘들어 난 그녀에게 아픈 상처를 준 전남편의 모습을 지워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리고 간혹 그녀의 남편 얘기가 나오면 나쁜 쪽으로 말한건 오히려 정경이었다. 근데 오늘 대답은 아니었다. 기분이 나빴는지 나보고 집에 가란다.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백수아가씨: 어제 생각해논 코트를 입고 만화방을 갔다. 이병씨가 오늘은 반가운 표정이 아니다. 무뚝뚝하게 나를 맞이하더니 또한 무뚝뚝하게 밖으로 나갔다. 무슨 안좋은 일 있나? 안좋은 일이 있다면 풀려야 할텐데.. 라면주문이 없나? 어제 단골녀석이 가르쳐준대로 집에서 라면을 끓여보았다. 그녀석이 끓인 것보단 못하지만 괜찮았다. 달라진 나의 모습을 나의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코트안에 손을 넣고 만화방안을 둘러보았다. 아직 손님이 별로 없다. 어? 왠 열쇠지. 아 맞다. 그때 이병씨가 준 열쇠. 아직 내가 가지고 있었구나. 어디다 넣어두지? 이병씨가 즐겨적던 공책에다 꽂아두면 그가 빨리 찾겠지. 카운터책상밑의 공책을 꺼내어 펼쳤다. 무슨 글이 적혀 있다. 소설같이 길게 적혀있다. 중간중간 읽어보았다. 쿠쿠. 완전 삼류 연애코믹소설이다. 하나도 야하지 않는데 그 옆에 적혀 있는 이병씨의 생각이 넘 웃긴다. (넘야한가. 나중에 수정해야겠다.) 쿠쿠. 꽤 오랜시간 소설을 보았다. 글자 틀린것도 많구나. 나중에 기회되면 수정해주어야겠다. 내가 또 국문학도 아닌가. 유치하지만 재미는 있다. 책장을 넘겼다. 음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지네.. 줄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정경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일기같이 쓰여진 그의 글을 보았다. 이걸 보아도 되나? 계속 읽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정경이다. 기분이 좀 그렇다. 이혼녀를 좋아하는 그가 안되어보이면서도 로멘틱하다. 밝은 느낌의 글이 이어지다가 또 어둡게 변했다. 그의 일기같은 글에서 묘한 느낌의 단어를 찾았다. '최혜지?' 내 이름이다. 그리고 물음표? 물음표는 뭘 의미할까? 내 앞에 누군가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단골녀석이 올시간이 되었구나.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단골녀석이 아니라 이병씨였다. 많이 놀랐다. 오늘은 그가 아주 빨리 돌아왔다. 어두운 표정이다. 그가 내가 들고 있는 공책을 보았다. 난 어색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어며 한손가락을 깨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열쇠끼워 놓을려고 그랬다가..." 아무말 없이 그가 공책을 뺏는다. " 앞으로. 이공책은 손대지 마세요." 아주 쌀쌀한 대답이다. 그말의 어감은 기분이 많이 나빴다는 투다. 하긴 자기고백같은 글이었으니까.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 그래서 변명같은 사과의 말을 했다. "괜찮으니. 접어둬요."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가는 그를 따라갔다. "저기요.. 뒷부분은 안보고.. 소설만 읽었어요." 그말을 듣자 그가 버럭 소릴 질렀다. "괜찮다니까요!" 깜짝 놀랬다. "내가 만화방볼테니. 집에나 가요." 만화방손님들도 무슨일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그는 문을 홱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집에 가라고 그랬지만 갈수가 없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가 카운터에 앉자. 그의 옆에 말없이 섰다. 그는 아무말 않고 한참동안 그냥 앞만 보고 있었다. 내가 집에 가질 않고 옆에 서있자. "그냥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요. 그리고 남의 일기같은건 훔쳐보는게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집에가세요. " 쌀쌀하게 날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안녕히 계세요." 그말 한마디만 하고 만화방을 나왔다. 내말은 많이 떨리고 있었다. 계속 그가 좋아졌었는데... 의외의 일격을 당했다. 오늘 아주 낯설게 그가 딴사람같이 날 대했다. 자취생: 어? 오늘은 그녀가 없고 아저씨네. 김샜다. 혹시 모르니까 만화책을 보고 있자. 티켓을 끊는데 주인아저씨가 대뜸 묻는다. "혜지씨 친구에요?" 혜지씨? 누구말이지? "예?" "여기 아르바이트하는 여자분 친구냐고요?" 그녀이름이 혜지구나. 이름도 이쁘다. 맞지 암 친구지. 곧 애인이 될지도 모르지. "아..예." " 이름이 뭐에요?" 뭐야 이놈. 건방지게 묻고 있어. 답해주기 싫다. "말하기 싫은가보죠? 그럼 몇살이에요.?""26살인데요." "혜지씨하고 같군." 기분은 별로지만 그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신난다. 만화방을 둘러보았다. 만화책보고 있는 놈들이 모두 이제는 내려다 보인다. 만화방총각: 갑자기 너무 싸늘하게 변해버린 그녀의 태도에 당황이 되었다. 왜 그러냐? 그리고 화났니? 미안하다.그녀에게 말을 자꾸 걸었다. 그러나 돌아선 그녀의 태도는 더욱 싸늘해졌다. 집으로 가라며 뒤돌아선 그녀에게 난 "그럼. 다음에 봐."란 말만 남기고 음반점을 나와야했다. 아직도 가을이 끝나지 않았다는냥 가로수에 마지막 잎새 지지않고 붙어있다. 그 잎새에 방금 싸늘한 표정의 정경이 얼굴위로 만화방에 있을 밝은 모습의 혜지씨 얼굴이 겹쳐졌다. 만화방가서 혜지씨한테 밝게 인사하고 기분풀자. 정경이도 괜히 그러는거겠지. 하긴 그녀의 남편을 욕했는데 기분 좋았을리 없지. 만화방에 들어서니 혜지씨가 내소설공책을 읽고 있다. 아침에 그 공책은 나에게 참 싫은 느낌을 주었었다. 혜지씨에게 밝게 인사할려고 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계속 미안해 하는 혜지씨의 태도가 싫었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혜지씨가 집으로 갔다. 가고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녀석이 들어왔다. 밝은 표정이다. 왠지 그 밝은 모습이 싫다. 앞에 혜지씨의 모습속에 이녀석의 지금 웃고 있는 모습이 들어 온다. 백수아가씨: 방에 혼자 누웠다. 오후의 이병씨 태도를 생각해보았다. 내가 잘못한 것은 틀림없는데 낯선 그의 태도에 당황했었다. 풀지 못하고 엉킨 실처럼 기분이 찜찜하다. 풀어야 되는데. 내일은 좀 일찍가서 대화를 해야겠다. 그래 내일가서 생각하자. 그러나 좀처럼 오늘 이병씨와의 일이 잊혀지지 않고 날 괴롭힌다. 시계를 보았다. 10가 훨씬 넘었다. 아직 만화방문을 닫지는 않았겠다. 그래 지금 가서 풀자. 만화방총각: 기분이 계속 안좋다. 뭔가 붕떴다 가라앉은 느낌이다. 정경이한테 전화를 해보았다. 정겹게 전화를 받는 그녀에게 오늘일은 미안하다고 그랬다. 그런데 당분간 찾아 오지 말라는 그녀의 답을 들었다. 내가 그사람 안좋게 말한게 이런 답을 들을 정도로 잘못한 것일까? 별말 못하고 다시 "그럼. 다음에 봐."란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요즘 오후에 그녀 찾아가는 즐거움이 무척이나 컸었는데. 꼬마가 아끼고 아끼며 먹던 막대사탕을 뺏긴 것처럼 허전하다. 밤 문닫을 쯤에 혜지씨가 찾아 왔다. 정경이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이 반갑지가 않다. 잊어버린 오후일을 꺼집어 낸다. 괜히 화풀이를 혜지씨한테 한거 같다. 나도모르게 큰소리로 "괜찮다니까. 왜그래요?"라고 말했다. 애써 사과하러온 그녀가 나의 이런 모습에 놀랐나보다. 멀뚱멀뚱 눈을 크게 뜨고 고정된 모습으로 날 쳐다본다. "난. 그냥.. 미안해서.." 그녀가 말을 더듬거린다. 왜 자꾸 저럴까? 그게 뭐 그리 크게 미안한 짓이었다고. "내일 이야기 해요.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그랬잖아요." 톤이 높은 음으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한참 그녀가 말못하고 서있다. 그 모습을 외면하고 만화책을 정리했다. 한사람 남아 있던 손님도 이제는 나갔다. 그 손님과 계산을 할때도 그녀는 문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가라니까. 왜그렇게 서 있어요." 그말을 내뱉고 만화책 정리를 계속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울음섞인 그녀의 목소릴 들었다. 내일이 아니고 다음? 고개를 돌려 혜지씨를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난 저 눈물의 의미를 알수 있었다. 저건 자기자신에 대한 눈물이지. 무언가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때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답답함으로 흘리는 눈물이란걸. 그 눈물을 보니 내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경이한테 당한 내꼴을 지금 혜지씨가 당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당한건데.. 미안하다. 돌아서는 혜지씨의 팔을 잡았다. "미안해요. 오늘 누구한테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데... 그 사람한테 내야할 짜증을 혜지씨한테 내고 말았네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떨어졌다. 착찹한 내마음이 그녀의 눈에 맺힌거 같다. 아무말 못하고 그녀가 돌아선다. 아직 난 그녀의 팔을 잡고 있다. " 다음에 봐요." 아직 다음이다. 아무래도 그녀가 내일은 나오지 않을거 같다. 다시 팔을 끌었다. "화 풀어요. 혜지씨한테 화난게 아니라니까요." 나의 말을 들은척 만척 다시 돌아선다. "가볼께요." 팔을 놓아주었다. 이게 아니다. 두명의 기쁨을 다 잃는 느낌이다. 힘없이 돌아선 그녈 잡았다.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도 뭔가 잃어버린 표정이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녀가 나를 떨쳐놓았다. 크게 뜬 그녀의 두눈을 보았다. 뺨한대 맞을거 같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 눈의 눈물자욱은 지워졌으나 왠지 모를 원망의 눈빛이 있었다.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게 아닌데... 오늘은 정말 생각하기 싫다. 백수아가씨: 무언가 답답한 느낌이다. 그가 나한테 왜 이토록 차갑게 대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매달리는 것도 싫다. 그냥 집에 가버리면 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더 이상 초라해지지 말아야하는데. 답답하다. 눈이 흐려진다. 내기분처럼 눈앞이 눈물로 흐려졌다. 오늘 이병씨 그가 나한테 키스를 했다. 간혹 그와 키스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고 그 생각에 미소짓기도 했다. 그가 좋아지고 내 마음속 그의 자리도 커져갔었지만 이건 아니다. 꼬마가 부푼 기대를 가지고 선물상자를 풀었는데 아무것도 없었을때의 느낌같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기분이 그렇다. 옛생각이 난다. 사춘기때의 천진함으로 돌아가고 싶다. 자취생: 오늘은 소득이 크다. 그녀이름과 나이를 알았기 때문이다. 만화방아저씨 허위 정보면 가만 안둘껴. 그녀가 이제 손에 잡힐듯한 곳에 있는것만 같다. 하하하. 개과라 놀림당하던 나도 애인이 생길수 있다. 아자. 만화방총각: 오늘은 만화방 문열기가 싫다. 어제 일은 반드시 혜지씨한테 사과해야겠다. 오늘은 혜지씨가 만화방을 나오지 않을것같다. 집에가자 그래도 아빠 엄마는 항상 나를 품고 있으니.. 백수아가씨: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다. 그냥 방안에만 있고 싶다. 다른 생각을 할려고 무던 애를 썼다. 쿠쿠 그단골녀석이 생각에 잡히자 웃음섞인 미소가 흘러 입가에 맺혔다. 자취생: 어라 만화방문이 잠겨있네. 그녀한테 써먹을려고 어제 밤새 외운거 다시 외어야겠 다. 좀 긴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푸시킨." 기다려보자. 문열때까지.. 배가 고파서 안되겠다. 어둠은 배가 고프기도 전에 찾아왔었다. 완전히 겨울로 접어들었나 보다. 만화방총각: 집에서 하룻밤을 지샜다. 일어나니 따뜻한 아침이 차려져 있다. 힘없는 내 모습에 엄마도 측은한 생각이 드셨나보다. 엄마가 아빠한테 하는 소리를 들었다. "저럴줄 알았으면 그때 합격 통지서왔을때 그곳에 취직시키는 건데 그랬어요. " 훗. 그소리는 분명 나를 화나게 했어야 했지만, 화내고 싶지가 않다. 못들은척 했다. 정경이한테 전화를 할려고 수화기를 들었다가 혜지씨생각에 수화기를 놓았다. 백수아가씨: 옛 추억을 생각하면 가을느낌이 살아난다. 최근 일들이 하룻밤 꿈같다. 고교 앨범을 꺼내보았다. 친구들. 친구들의 환한 모습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리고 선생님. 내가 짝사랑했던 선생님의 모습이다. 지금은 어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까? 그의 표정없는 사진밑에 '진중화'라고 적혀있다. 그 이름이 고교시절 우리들에게 얼마나 재미난 추억을 주었는지 이 분은 모르는 듯 무표정이시다. 중학교. 국민학교앨범들을 다 꺼내놓았다. 국민학교때는 사투리 쓴다고 첨에 놀림을 좀 당했었지. 서울은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내 생활터전이 된 곳이다. 그때 날 놀리던 아이들의 사진도 정겹게 눈에 들어왔다. 훗 유치원앨범이다. 내 어린시절의 기억을 담고 있다. 우습지만 내 첫사랑도 여기에 있다. 이제는 내 바로앞을 지나쳐도 몰라보겠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다. 뭐가 좋아서 그녀석한테 시집간다고 그랬을까? 앨범을 펼쳤다. 혹시 잊어버릴까봐. 그녀석 사진은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칠대삼 가르마에 사각모쓴게 귀엽다. 이현재라... 이놈은 아직 그곳에 살고 있을까? 지금은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같은 국민학교를 들어갔었는데, 곧 헤어졌지만. 그때는 내가 컸었던거 같다. 앨범을 덮었다. 낡아서 금박칠한 부분이 많이 떨어져나간 진주유치원이라는 글자가 내눈에 들어왔다. 자취생: 3일째 그녀를 보지 못했다. 시험도 끝났다. 뭔가 추억을 남기고 졸업하고 싶다. 이제 시간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오늘 면접볼려고 양복을 입었다. 졸라 춥다. 만화방총각: 만화방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많이 춥다. 하루밖에 비우지 않았던 만화방이 참 낯설게 느껴진다. 오늘 혜지씨는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수당을 계산해보았다. 한번은 오겠지. 소설이나 쓸까? 방으로 들어가 공책을 꺼내왔다. 펜을 드니 또 감상적이 된다. 정경이 이름을 적고 느낌표를 두개 찍었다. 그리고 혜지씨 이름을 적고는 물음표를 두개 찍었다. 백수아가씨: 이틀동안 방안에만 있었더니 몸이 나른한게 안좋다. 오늘도 만화방은 못가겠다. 한동안 갈색톤으로 채색되어진 내 맘이 흰색의 겨울빛 으로 바꼈다. 차분하다. 첫키스 한것도 아닌데, 괜찮다. 그냥 그때의 일 잊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병씨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은 생기지 않는다. 그는 나의 초라해져가는 맘에 묘한 설레임을 안겨다 주었었다. 그 설레임은 오랜만에 느끼는 큰 신선함이었다. 그러나 그 설레임은 금방 끊어질것 같은 실에 메달린 커다란 풍선같은 것이었다. 자취생: 면접보는데 너무 떨었다. 추워서 그랬는데 면접관은 나보고 소심하다고 말한다. 씨. 아무래도 여기는 떨어지겠다. 이제 남은 곳은 한곳 밖에 남질 않았다. 그 곳 마저 떨어진다면 짤없이 대학원이다. 혹시 백수될까봐 대학원응시를 했는데 운좋게 합격했었다. 그러나 난 더이상 개과에 미련두기는 싫다. 집에 돌아오는데 벌써 해가 져버렸다. 만화방이나 가봐야겠다. 몸은 여전히 떨고 있다. 만화방에는 주인아저씨가 지키고 있었다. 이상하네. 그녀가 아르바이트 한지 아직 한달도 안되었는데. 짤렸나? 주인아저씨가 날 보더니 참 반갑게 맞이했다. 요전하고는 딴판이다. 그래 저렇게 대하는데 조금만 보고 가자. 만화방총각: 저녁이 되니 기분이 차분해 졌다. 그래 내가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내 주위엔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정경이는 다시 찾아 가면 되는거고, 혜지씨는 예전처럼 낯선 사람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단지 그녀에 대한 물음표만 지우면 된다. 단골녀석이 왔다. 굉장히 떨면서 들어온다. 밖이 춥긴 추운가 보다. 저녀석 모습이 오늘따라 반갑다. 그가 나갈때 혜지씨 보면 저번에는 진짜 미안했었다고 말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녀석이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그래 무슨일 인지 알리 없겠지. 그냥 그렇게만 말하면 알것이라고 했다. 백수아가씨: 엄마 심부름 때문에 바깥을 나갔다. 깜깜하다. 저녁 반찬거리하고 초코파이, 박카스사오라는 심부름이다. 쌀도 충분한데... 초코파이하고 박카스는 왜 사오라고 하는거지. 초코파이가 중독성이 있나보다. 수퍼를 갈려면 만화방을 지나쳐야 한다. 만화방 불빛이 초라하다. 며칠전까진 많은 설레임과 즐거움을 주던 곳인데, 오늘 그곳은 낯설고 또한 초라해 보인다. 날씨가 엄청 춥다. 자취생: 집에 갈려는데 주인 아저씨가 혜지씨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랬다. 뭐가 미안할까? 그녀한테 미안한 짓을 했단 말이야? 나쁜놈이구만. 날라차기 해버릴까? 따뜻하게 난로 피워나서 참는다. 몸이 많이 녹았다. 알았다고 했다. 나오는데 참 반가운 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다. 손에 뭘 많이 들었다. 들어주고 싶었다. 참 아까 주인아저씨가 미안하다는 말 전해 달라고 그랬지. 기회다. 쫓아갔다. 그녀 앞으로 갔다. 만화방아저씨가 부탁한 말을 전하는데 버릇이 되었나? 만화방총각: 조용히 밤은 깊어가고 있다. 기분은 차분해졌는데 뭔가 허전하다.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자. 먹을만 하다. 백수아가씨: 엄마가 사오라는게 생각보다 많았다. 박카스박스가 포함되니 상당히 무겁다. 초코파이도 사야되는데.. 날씨가 추워 들고 있는 손이 시리다. 내 하얗던 손이 발갛게 변했다. 만화방을 다시 지나쳤다. 후... 내가 일기장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밤에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아직 불안한 내 마음속 풍선은 아슬하게 메달려 있나보다. 그때 뒤에서 누가 달려와 내 앞을 막았다. 녀석이다.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기분이 밝아진다. 녀석을 어제 오늘 잊고 있었구나. 그래 이상하게 친근감을 주는 저녀석이 있었지. "그때의 일은 진짜 미안했다. 만화방아저씨." 뭐야 또? 자기도 황당했는지 머리를 긁적인다. "만화방아저씨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저번에는 미안했다고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흠...그러나 그말은 녀석의 모습처럼 반갑지가 않았다. 녀석이 내가 들고 있던 무거운짐을 들어준다고 했다. 고맙지 뭐. 그럼 우리집을 가르쳐 주는 격이 되는데... 그래 가르쳐주면 어때. 녀석 때문에 편히 집앞까지 왔다. 엄마한테 따져야겠다. 녀석도 무거운지 이쪽 팔에 들었다, 저쪽팔에 들었다하는 걸 나보고 들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고... 자취생: 저번에 라면끓일때도 그렇고 이번에 짐달라고 할때도 그렇고 순순히 응한다? 음... 기분 괜찮군. 같이 걸어서 기분은 좋은데 왜 아무말도 안할까. 자기만 따라오라는 건가? 그 녀 옆에서 걸었다. 짐 때문에 걸린다. 다른손에 들어야겠군. 근데 왜 또 짐쪽옆으로 오는거야? 다시 이쪽손에 바꿔들었다. 그녀 집앞에 도착했다. 대문앞에다 짐을 놓으니. 그녀가 벨을 눌렀다. 아직도 아무말이 없다. 에라 모르겠다. 그녀가 보지도 않는데 뒤에서 말해버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푸치니" 그녀가 뭔가 생각하더니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푸시킨 아닌가요?" "에?" 이런 멍청이 그새 까먹었냐. "그럼 가볼께요."라고 말하고 뒤돌아섰다. 빨리 도망가야쥐. 그걸 알다니 똑똑한 여잔가보다. 에고 쪽팔려라. "잠깐만요." 뭘까? 혹시 푸치니가 맞다고 말할려고 하는걸까? 고개를 돌렸다. "내일 만화방가면 모래쯤 저 나온다고 주인아저씨한테 말해주겠어요.? " "모래쯤이요? 예." 뭔일인지 몰라도 내일도 그녀가 만화방을 안나가는 구나. 그러나 모래는 만화방에서 보겠다. 하하 "안녕히 계세요." "잠깐만요." 또 뭘까? " 고마웠어요. 저번에 라면사다주신것도. 라면끓여준것도..잘가세요. 그럼" 에. 그녀한테 정겨운 인사를 받았다. 그녀가 집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기분이 묘한게 춥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