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아가씨: 그가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래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자. 전혀 현상황과 안맞는 말만 하더니 오늘은 다르네. 이병씨 그를 내가 피할 이유가 없다. 그래 만화방 다시 나가자. 그러고보니 급료도 받지 않았다. 녀석이 참 고맙다. 녀석한테는 따스한 말한마디 해 준적도 없는데, 고맙다는말 해주어야겠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등을 돌려 갈려고 한다. 그의 뒷모습이 찬바람에 떨고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정겹게 내맘에 들어온다. 집에 들어와서 엄마한테 따졌다. 이무거운걸 나보고 들고오라고 했냐고. 무거워 죽는줄 알았다고. "그게 뭐가 무겁다고 엄쌀이냐. 난 저번에 20킬로 쌀가마니도 들고 왔다." 밤에 녀석 모습이 떠올랐다. 추운지 떨고 있었지만 따스한 미소를 나한테 남겨주었다. 급료받으면 털실하나 사야겠다. 오랜만에 뜨개질이나 해보자. 자취생: 그녀가 집에 들어갔다. 안 잊어먹게 이곳을 유심히 봐두자. 여기가 그녀가 사는 집이란 말이지. 하하 또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집까지 알아내다니 대단한 수확이다. 근데 참 집이 낯익다. 언젠가 한번 와본적이 있는거 같다. 집으로 오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맞다 쌀가마니! 그리고 부라자! 부라자? 그럼 그때 그것이 그녀의 것? 푸헬헬 앗싸. 아이고 아까워라. 그때 눈 딱감고 하나 훔쳐오는건데...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면접본건 생각도 안난다. 상관도 없다. 이름이 혜지인 그녀에 대한 생각뿐이다. 만화방총각: 눈을 떴더니 밖이 환하다. 아침햇살이 내 창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걸로 봐서, 늦잠을 잔거 같다. 백수아가씨: 녀석의 미소가 늦은밤까지 머물다 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무도 없다. 엄마는 밥도 안차려 놓고 또 어디를 가셨을까? 자취생: 잠에서 깨었는데 밖은 아직 어둠속에 있다. 시험공부한다고 요며칠 새벽에 일어났더니 그게 또 몸에 베였나보다. 아직 어제의 두근거림이 있다. 조깅이나 할까? 그녀집쪽으로... 그녀 집골목으로 점퍼하나 입고 뛰었다. 만화방총각: 오전에 공책을 펼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감상적이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글이 잘 이어진다. 이제 마무리 부분으로 접어들고 있다. 주인공이 많은 심적 변화와 유혹을 뿌리치고 한여자를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끝이날것이다. 정경이 생각으로 한여자를 그렸다. 그래서 요며칠 소설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마음이 차분한게 글이 잘이어지고 있다. 후후... 큰 두눈과 맑은 눈물, 그리고 이제와서야 달콤함을 주는 그 찰나의 입술느낌... 정경이 때문에 답답했던 내 마음이 누군가의 생각으로 참 맑아졌다. 오늘 소설속 한여자의 모습에는 혜지씨의 모습이 담겨졌다. 손님이 들어왔다. 이제 그만 적어야겠다. 백수아가씨: 며칠만에 편안하게 잠이 들었었다. 창문을 여니 차지만 상쾌한 바람이 들어온다. 아침은 내가 만들어 먹어야겠다. 오늘은 뭘 할까? 요앞 대학도서관에 책이나 보러갈까? 녀석도 그 학교 다니는거 같다. 몇살일까? 몇마디 안해봤지만 억양이 서울사람 같지가 않았는데... 이름은 또 뭘까? 어제 이름이나 물어볼걸 그랬다. 이 근처에 사는건 확실한데... 그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생긴다. 그 궁금증들이 이병씨에 대한 불안한 설레임과 답답함을 걷어내는거 같다. 자취생: 그녀 집앞을 지나 골목 끝까지 달렸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집을 보며 달려왔다. 즐겁다. 춥지만 달리고 싶다. 그녀 집쪽으로 달려가는데. 그녀의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나왔다. 내가 또 인사성은 밝잖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어! 열심히네. 그래 나중에 봐." 날 아나? 아버님께서 출근을 하시는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다시 돌아왔다. 너무 무리하는 걸까? 약간 숨이 가프고 찬바람에 얼굴이 따끈거린다. 혹시나 한번 볼 수 있을까. 집앞을 뛰어봤지만, 이제는 안되겠다. 그녀의 집을 쳐다보며 천천한 걸음으로 내 자취방쪽으로 향했다. 그녈 볼수는 없었지만 저곳에 지금 그녀가 내가 알지 못한 어떤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하다. 집 대문이 열렸다. 많이 놀랬다. 그녀가 보고 싶어 왔지만 여기서 마주치면 난감하다. "안녕하세요." "어. 누구지?" 만화방총각: 만화방안이 많이 덥다. 졸음이 온다. 전화기를 보니 음반점에 전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망설임이 생긴다. 하지만 지금 이 차분한 기분을 잃고 싶지가 않다. 백수아가씨: 어라? 엄마가 오늘 왠일로 약수통에 물을 받아 오시는 거지. 저건 아빠도 들고가시길 꺼려하던 큰것인데? 바깥날씨처럼 차가운 그 물이 내 마음을 적셨다. 아 시원하다. 그 시원함에 어디 외출을 하고 싶다. 그래 아까 맘먹은데로 요앞 학교나 가보자. 혹시 아냐? 그녀석이라도 보게될지... 자취생: "아.. 그때 눈길에 넘어졌던 학생이구나." 이런! 내가 쌀가마니 들어준 것은 기억 못하시나? 아줌마의 한손에는 자그마한 물통이 들려있었다. "어디. 운동가나보지?" 운동 다했는데... "예. 매일 여기서 학교까지 조깅하는데요. 참 상쾌하거든요." 잘 보일려면 할 수 없다. "학교? 요앞 대학교말이지? 그 학교 학생인가보지?" "예." "잘 되었네. 나도 그 학교안에 있는 약수터가는데..." "아. 그래요." "나하고 같이가면 되겠다." "예?" 집에 가야되는데... 이제는 배도 고픈데. "잠깐만..." 그 아줌마께서, 아니 어머님께서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래 가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다보면 그녀 이야기도 나오겠지. 근데 집에는 왜 다시 들어가셨을까? 한번밖에 안 봤는데, 이집 식구들은 사람들한테 친하게 잘 대한다. 어머님께서 나오셨을땐 아까의 작은 물통대신 20리터 큰 물통이 들려져 있었다. "우리 아들도 이학교 다니는데." "아. 예." "학생은 무슨과야?" "기계공학과 다니는데요." "정말? 우리아들도 기계공학과 다니는데. 지금은 군대가 있지만." "아. 예. 몇학번 누군데요? 제가 아는 학생일수도 있겠는데요." "95학번이고 이름은 최혜철인데..작년 봄에 군대갔어. 내년봄에 제대할거야." 두가지 정보를 얻었다. 그녀의 성은 최씨고 남동생이 하나 있구나. "아. 제가 군대 있을때 입학했네요. 그리고 제가 복학했을때는 군대가버렸고..전 92학번이거든요." "그래? 학생이 많이 선배네. 호호 길게 말하니까. 사투리가 많이 표난다. 경상도 어디서 올라왔어?" "예. 진주라고...혹시 아세요?" "진주? 우리남편이 진주사람이잖아. 나도 삼천포사람이고.. 우리 예전에 진주에서 살았었어. 야 반갑네.". "예. 반갑네요. 만나면 꼬박꼬박 인사드려야 겠네요." "그래. 내년에 우리아들 제대하면 잘 봐줘" "저 곧 졸업하는데요." 학교 안 약수터에 도착할때까지 어머님은 혜지씨에 관한 말씀은 하지 않았다. 에고 무거워라. 어머님은 여전히 말을 많이 하신다. 사촌이 땅을 샀다느니. 자기 남편이 어디회사 실장이다라느니. 군대가서 고생하는 아들보니 맘이 아팠다느니.. 하지만 올때도 그녀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설사 그녀얘기를 하셨다하더라도 난 대답이나 다른 어떤 질문도 하지 못했을것이다. 물통이 장난이 아니게 무겁다. 배도 고프고 이미 뜀박질로 체력이 다한상태서 이 무거운 물통은 차라리 삶의 무게였다. 하지만 사랑은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애써 힘든 표정을 감추고 물통을 낑낑 들고 걸었다. 그녀 집앞에 물통을 내려놓았을때 난 반사상태였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이렇게 많은 땀을 흘려 본게 몇년만일까? 어머님께서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나다." 참 반가운 목소릴 들었다. 문이 열리고 어머님께서 낑낑거리시며 겨우 물통을 끌고 들어가신다. 첨부터 나한테 맡길려고 작정하시고 큰 물통으로 바꾸신게 틀림없다. "고마워. 학생. 참. 아까 그 목소리 내딸인데.. 참 이뻐. 담에 소개시켜주께." 하하. 드디어 그녀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소개까지 시켜준댄다. 참 기뻐해야 하는데, 내몸은 이미 내몸이 아니었다. 만화방총각: 혜지씨가 출근하는 시간이 되어온다. 오늘도 나오지 않는걸까? 기다려진다. 그 단골녀석이라도 와주면 좋겠는데, 그녀석도 보이질 않았다. 많이 기다렸지만 혜지씨는 오지 않았다. 또 답답해진다. 그 답답함에 정경이에 대한 생각까지 겹쳤다. 괜히 정경이한테 전화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혜지씨의 오지않음이 전화할 용기마저 꺾어 놓았다. 마음이 불안하게 붕 떠오른다. 잡지 못한다면 울음이 나올것만 같았다. 밖이 깜깜해져 오고 있다. 더 깊이 짚어보면 더 아름다게 정겨운 추억이 있었지만. 최근의 음반점에서의 애틋함과 밝은 표정의 정경이 모습이 떠 올랐다. 그리고 지금 별것 아닌것 같은 일로 태도가 참 많이도 바꼈던 정경이의 모습이 날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그걸 잊고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무언가 잡힐듯한 꿈 때문이었을까? 오늘 혜지씨가 많이 기다려졌었고 올것만 같은 기대가 들었는데... 이제 내 옆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공허함만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백수아가씨: 쌀가마니 들어 주었던 학생이 조금 들어주었다는 엄마말씀에 의심이 간다. 그때도 그랬지만 대부분 엄마가 들고 왔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엄마의 술수에 선량한 학생하나가 희생당한거 같다. 것두 두번이나... 에구 불쌍한 사람. 우리엄마한테 찍혔구만. 앞으로 우리 엄마 눈에 안 띠기만을 빌어줄께. 그래도 그 착한 학생이라는 사람이 고맙긴하다. 우리엄마 고생들어주어서... 밥을 먹고나서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정장차림에 버버리코트까지 입었다. 기분전환이다. 내가봐도 모델같다. 립스틱은 바르지 않다. 분위기 망치기 싫기 때문이다.학교를 한바퀴 걸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나 학생이 별로 없는 차분한 분위기의 교정이다. 차운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 학교에서 녀석이 캠퍼스추억을 만들고 있었구만. 몇번 와봤지만 오늘은 느낌이 다르다. 도서관엘 갔다. 바코드 출입구가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내가 못들어갈소냐? 남학생하나 붙잡고 학생증좀 빌려달랬다. 기분좋게 빌려준다. 들어가서 돌려주었다. 내 미모는 학교때 제법 인정을 받지 않았더냐. 호호. 소설책하나를 골라 오랜시간 보았다. 여유롭다. 왜 진작 이런 생활을 못했을까? 시간은 자기가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 여유로울 수도 있구나. 졸업하고 너무 마음적으로 여유가 없었던게 별로 하는것도 없이 시간적으로도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저녁이 되어 갈무렵 도서관을 나왔다. 혹시나 하며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공대앞에서 커피를 하나 뽑아 마셨다. 후후. 족구금지푯말을 네트삼아 족구를 하고 있는 공대생들을 보았다. 우리학교는 공대가 없었다. 여고생이 남자고등학교에 온듯한 묘한 설레임이 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두워져 가는 겨울 하늘 아래 공대지붕이 걸려있다. 녀석을 못보고 돌아왔지만 마음은 차분하게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다. 만화방 불빛이 오늘은 그렇게 초라하게만 느껴지질 않았다. 내일은 만화방을 다시 나가봐야겠다. 자취생: 집에 돌아오니 팔에 감각마저 없어졌다. 밥이고 뭐고 귀찮다. 저번에 사다 놓은 초코파이랑 박카스로 허기만 때우고 깊은 잠에 빠졌다. 일어나니 해가 꾸역꾸역 지고 있었다. 내창문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빨갛다. 더 자고 싶지만 배가 너무 고프다. 만화방아저씨한테 혜지씨가 내일은 나온다는 말도 전해주어야 된다. 일어나자. 만화방총각: 저녁의 어둠이 애처롭게 짙어지고 있다. 답답함에 정경이한테 전화를 했다. 전화기속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오늘도 그녀는 일상처럼 그곳에 있었구나. 하하. 녀석이 왔다. 예전에 본 한여름들판의 잡초같이 머리가 엉맘이다. 거울을 안보고 나왔나보다. "아저씨! 혜지씨가 내일은 나온다고 그러던데요." 무척이나 반가운 말을 들었다. 이말을 들을려고 내맘은 낮부터 그렇게 떨렸었나보다. "근데 무슨 안좋은 일 있었어요? 아프지도 않은거 같았는데... 혹시?" 혹시 뭐? 녀석이 내맘을 알기나 할까? 황당한 소릴한다. "라면 못끓인다고 핀잔 주었어요?" 쿠쿠 생각하는게 자네다와 보인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화를 좀 내어가지고..." 나의 이말을 듣자 뭔가 큰 불만이 있는듯 날 째려보고 간다. 내일은 혜지씨가 나오는구나. 다시 며칠전의 그 밝은 모습 속에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오랜시간이 지나버린것 같은 그때의 설레이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음 좋겠다. 백수아가씨: 날씨가 많이 춥다. 목있는 니트를 입고 나왔지만 그래도 목이 시리다. 집에 들어가려다 발길을 돌렸다. 털실을 살려고 수예점을 찾았다. 털실은 내가 그것을 멀리하던 사이 엄청 비싸있었다. 이 돈이면 고급 립스틱도 살수 있겠는데... 집에 남아 있는 이 달 용돈이 위태하다는 것도 잊고 가지고 온 돈을 다 털어 털실을 샀다. 다시 만화방을 지나쳤다. 털실에 담긴 따스함때문일까? 이젠 초라해져 보이지 않는 만화방불빛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자취생: 밖에 나가야되는데 거울을 보니 내 머리가 엉망이다. 머리를 감아야겠다. 물이 너무 차다. 물이 타이타닉이다. 제대를 하고 나서 외모에 대해 많은 자신감이 생겼다. 남들이 느낄땐 객기라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녀는 내일 만화방에 나온다고 했다. 잘보일 사람도 없다. 이대로 나가자. 스웨터를 하나 껴입었다. 늘어난 목. 자취생의 비애다. 아무리 깔끔하게 옷을 입고 있어도 티나 스웨터의 목이 늘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자취생이다. 목이 허전하다. 만화방아저씨가 힘없는 표정을 하고 있더니 내 말을 듣고 표정이 밝아졌다. 이 아저씨도 혜지씨 찍은거 아닌가? 반반한게 의심이 간다. 하지만 주제를 알아야지. 내가 감히 찍었는데 어디 만화방 아저씨 주제에... '근데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화를 냈을까?' ("혜지씨 당신을 좋아합니다. 제 사랑을 받아주세요." "안돼요. 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 단골로 오는 멋있는 그 자취생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아저씨는 절 포기하세요" "제 맘을 몰라주시다니 너무 합니다. 흑흑. 화. 화. 화!") 쿠쿠 만화방아저씨를 쳐다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기분좋다. 만화방총각: 많은 기대감으로 혜지씨를 기다렸다. 오후 세시가 거의 되어서 그녀가 밝지만 어색한 듯한 인사를 하고 들어왔다. 나도 그녀의 모습처럼 어색하지만 밝게 답해주었다. 혜지씨가 카운터안 내 바로 옆에서 신간책을 정리하고 있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이 안에 있기가 부담스럽다. 그녀도 뭔가 어색하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떨리는 음의 내말을 그녀는 "괜찮아요. 그럴수도 있죠. 뭐. 다 잊어버렸어요."라고 그 또한 작지만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답을 들으니 여기 있기가 더 부담스럽고 어색하다. 그러던 차에 단골녀석이 들어왔다. 그도 분위기를 느꼈을까? 혜지씨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혜지씨. 나좀 나갔다 올께요." 그녀에게 만화방을 맡기고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갈때가 마땅치가 않다. 백수아가씨: 예전처럼 만화방을 단지 아르바이트생으로 가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내 심장이 빨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만화방에서 이병씨를 보았다. 반가움보다 낯설음으로 다가온 모습이다. 그가 내 옆에 어색한 모양새로 약간 안절부절하는 모습이다. 미안하다고 하는 그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 마음속 느낌표로 다가왔는데, 이제는 물음표다. 그가 예전처럼 어딜 가주었음 좋겠다. 그렇게 지금 분위기는 싫다. 단골녀석이 밝은 모습으로 들어왔다. 이병씨와 나의 분위기를 느꼈을까? 그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다. 이병씨가 헛기침을 한번하며 인사를 하고 나갔다. 만화방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이 예전처럼 활기차지가 않다. 힘없고 처량해보인다. 후. 녀석이 이병씨가 나가자 나에게 다가왔다. 자기가 나하고 친한 친구나 되는냥 묻는다. "주인아저씨가 혜지씨한테 화내었다면서요? 뭔일인데요?" 어쭈 이제는 이름까지 부르네. 내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까 이병씨가 던지고 간 인사속의 내이름을 들었나보다. 그냥 저번처럼 나 알아요?라고 대답해 버릴까? 그러기에는 이녀석 얼굴이 너무 천진난만하다. "오늘은 이상한 말 안하세요?" 녀석이 머리를 긁적인다. 그렇게 긁적이니 맨날 머리가 그 모양이지. 오늘은 그래도 단정한 편이구만. 녀석이 한참 머뭇거리더니. "어른들도 누구나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생떽쥐베리." 쿠쿠 니가 그러면 그렇지. 현상황과는 여전히 맞지가 않구나. 그런데 다음 그가 던진 말이 결코 앞의 말이 엉뚱한 말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자취생: 오늘은 그녀가 만화방에 있을것이다. 신난다. 물은 여전히 타이타닉이다. 하지만 머리를 감았다. 그러나 면도는 도저히 안되겠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면도를 했다. 음 깔끔해 보이는군. 거울 속 내모습이 어제와는 다르다. 만화방에 갔더니 기대한데로 그녀가 있었다. 오늘은 만화방아저씨도 어딜 안 가고 같이 있었다. 조금 어색했다. 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만화방 아저씨가 자리를 비켜준다. 이 아저씨 어디 가서 밥은 얻어먹겠군. 눈치가 빠르다.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밝지가 못하다. 또 안좋은 소리 들었나? 으이씨 내가 기껏 외어서 해준 말들을 그녀는 이상한 말이라고 했다. 아니 선현들의 주옥같은 명언들을... 이제 하지 말까 보다. 그치만 오늘은 뭘까? 하는 저눈동자.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수가 없다. 근데 어제는 안 외웠는데... 명언은 생각이 나는데 누가 한말인지는 모르겠다. 문득 생각난게 어린왕자였다. 이런말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지만... 하고나니 그럴싸하다. 오늘 왠지 어두운 빛이 감도는 그녀모습 때문에 한마디 더해 주었다. "아직은 밝은 표정 잃지마세요." 그녀가 오랜만에 나와서 그럴까? 만화방에 예전처럼 늑대들이 많지가 않았다. 라면 끓여달라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그녀한테 다시가 말을 걸 껀수가 생기지 않았다. 만화방총각: 밖에 괜히 나왔다. 엄청 춥다. 갈 곳도 없는데... 분위기 때문에 외투도 걸치지 못하고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추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 간 곳은 정경이의 음반점 앞이었다. 정경이의 모습이 비추어지는 유리문이다. 그녀의 분위기가 슬퍼보인다. 내 마음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테지... 그게 아니다. 손님이 없는 음반점안에서 그녀가 글썽거린다. 그 모습에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았다. 그녀가 내 모습을 보더니 눈물을 훔친다. "응? 이병이구나. 요며칠 왜 안왔어?" 참내. 자기가 오지 말라고 해놓고선.. 하지만 그 답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록 울음섞인 말투였지만... "술한잔 할래? 내가 한잔 살께" "술? 지금? 가계는?" 그녀가 가계는 괜찮다는 듯... 날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가계 문을 닫고 정경이와 나는 근처 작은 칵테일 바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스트레이트 몇잔 들이키더니, 말이 없다. 한참뒤 대뜸 내뱉은 소리는 "그가 새장가 간데."였다. " 요즘 찾아온것도 이거 줄려고 했던 거였어." 정경이가 보여준것은 청첩장이었다. "누군데? 새장가는 또 뭐야?" "내 전남편." 내가 뭘 잘못했다고. 꼭 나한테 따지듯 말했다. "난. 그래도 날 못잊었다며 찾아온 그가 진심인 줄 알았는데... 결혼한다는 말을 못해서였다는 걸 오늘이야 알았어." 뭐야 그놈. 그냥 새장가 들려면 모른척 가버리면 되지...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잘가라. 정경이가 또 한동안 아무말 없다. 그냥 앉아서 조용히 몇잔 더 마셨다. "일어서자." 정경이 눈치를 살피며 홀짝홀짝 하던 나는 그냥 아까 술집에 끌려 올때처럼 또 끌려나와야 겠다.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흘러 있었다. 아홉시가 다되었다. 정경이가 자기집이 예근처인데 바래다 달랬다. 물론 바래다 주지. 암... 그녀 집은 근처의 그리 크지않은 오피스텔이었다. 문앞까지 왔다. 열쇠를 따고 정경인 "잘가."라는 인사만 남기고 바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그 문앞에 약간은 멍한채 몇분간 서 있었다. 오늘 정경이가 자기 기분대로 날 대했다. 그렇지만 내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정경이가 안 되어 보였다. 그래 잘갈께. 너도 잘자라. 돌아갈려는데 문이 열렸다. "안가고 있었네? 들어와서 차한잔 하고갈래?"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기분데로 뭔 일을 저지를것도 같다. "아니야. 만화방일 때문에..." "만화방?" 아차 실수했다. "아 저번에 말한 도서사업이라는게 만화방이야. 하하. 그럼 나 갈께." 등을 돌려 발걸음 떼었다. 아직 문을 닫지 않고 있는 그녀 방의 불빛이오피스텔 복도에 비치고 있다. "이병아. 내일도 올거지?" 그녀의 그말에 내 입술에 미소가 맺혔다.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그래. 잘자." "내일 꼭 와야돼. 나. 지난 일년동안 너무나 외로웠었어..." 그녀의 독백같은 작은 목소릴 들었다. 뒤돌아 그녀한테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늘 만화방에서처럼 어색한 후회를 하긴 싫다. 급히 만화방으로 갔다. 혜지씨는 카운터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모습에 뜨개질하던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올때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었는데...? 만화방안을 둘러보았다. 단골녀석이 아직도 있다. 만화책은 보지 않고 난로옆 만화방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곤하게 자고 있었다. 만약 계속 있었다면 지금이 열시니까.. 여섯시간정도 만화방에 있었던게 된다. 단골녀석과 혜지씨가 같이 나갔다. 나가는 그 둘의 모습이 서로 아무 말없었지만 동화처럼 정답게 느껴진다. 백수아가씨: 단골녀석이 들어와서 한마디 하고 난후로는 아무말이 없다. 나도 굳이 그를 불러 말시키고 싶지는 않다. 오랜만에 왔더니 만화책 볼것도 많아서 좋네 뭐. 그런데 만화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털실이나 가져올걸 그랬다. 뜨개질이나 하는건데... 단골녀석을 불렀다. 잠깐동안만 만화방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집으로 털실을 가지러 갔다. 만화방에 돌아왔더니 녀석이 라면을 끓여 손님 한 분에게 갖다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웃음짓게 한다. 내가 온것을 보자 다시 여기로 오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막상 짤려니까 뭘 짜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시작은 해보자. 맘에 안들면 다시 풀면 되니까... 만화방안이 따뜻한게 아늑하다. 손님도 더 이상들어 오지 않는게 뜨개질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녀석이 여기 있다는 느낌이 또한 좋다. 한참동안 뜨개질에만 열중했다. 목이 조금 아프다.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 녀석이 갈 생각을 안하네? 녀석을 찾았다.푸하하..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예 이부자릴 깔아라 깔아. 기도하는 듯 두손을 가슴에 얹고 의자에 기대어 녀석이 잠들어 있다. 이 털실처럼 푸근한 느낌으로 녀석이 만화방안에서 자고 있다. 곤한 녀석의 모습을 괜히깨워 돌려보내기가 싫다. 다시 뜨개질을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배가 고프다. 손님들이 하나둘 나갔다. 아직 그는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거의 열시가 되어서 이병씨가 돌아왔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말투는 낮에처럼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술냄새가 났다. 그가 단골녀석을 보더니 나보고 "깨울까요?" 라고 물어 보았다. 저녀석 깨우는데 왜 나한테 물어보는걸까? 만화방을 녀석이 부시시한 모습으로 나를 따라나왔다. 이병씨가 녀석한테 만화요금을 받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서 나는 일부러 빨리 걷지를 안했다. 녀석이 나를 지나쳐 앞서 가기를 바랬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신경이 쓰인다. 녀석의 뒷모습이 보고싶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녀석이 하품을 하다가 놀라 입을 손으로 가린다. 골목이 나뉘는 부분에서도 녀석은 아무말없이 녀석의 골목쪽으로 사라졌다. 아직 잠 덜깼나? 늦은밤 저녁도 안먹고 배는 고프지만 그냥 잠들어야겠다. 녀석이 오늘 한 말 때문에 괜히 다시 일어나 불을 켰다. 그리고 유치원 앨범을 꺼내 보았다. 그앨범에 최혜지란 꼬마아이가 수줍은 듯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내가 아닌냥 그립다. 그날 난 머리맡에 유치원 앨범을 놓아두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