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생: 한판 붙었다. 그건 차라리 혼신을 다한 필사의 사투였다. 녀석의 삑사리에 웃음이 나왔다. 침착하자. 공이 이쁘게 모였으나, 각이 얇다. 내리찍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성공한다면 적어도 서너개정도는 가볍게 몰아칠수 있다. 그리고 쉬운 쓰리가락으로 게임 끝. 3대0에서 4대3의 기적같은 역전을 할 수 있다. 폼을 잡았다. 녀석의 견제동작이 들어왔다. "아저씨! 150이 맛세 찍네예." 픽... 얼라이요? 삑사리! 녀석에게 너무 좋은 공을 주었다. 녀석이 내리 아홉개를 쳤다. 독한놈. 그리고 50도 코후비며 친다는 기본우라가 떴다. 게임 끝이었다. 두시간에 걸친 사투는 결국 나의 패배였다. 으... 삑사리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불알과 우라는 주지말라. 그런데 난 그 두개를 동시에 주고 말았으니... 나의 패배를 인정했다. 녀석이 또 전화를 한다. "내다. 내 또 이겼다. 오늘 저녁사줄테니 나와라." "애인있는 놈은 조오~겄다!" 비꼬듯 말했다. "배아프면. 너도 만들어 임마. " 친구애인과 함께 저녁을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과 과일을 먹으며 비디오를 한판 때리고 있는데, 어머니의 눈초리가 수상쩍다. "니, 서울에서 여자 사귀제?" 어머니의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와. 사귀모 어때서..." 아버지도 거드신다.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 "오늘 서울에서 어떤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데이. 서울에서 여기로 전화할 정도면 사귀는 여자 아니겠냐?" "자식이 날 닮아서 인기는 좋구만!" 누가 나한테 전화를 해? 서울에서 나한테 전화할 여자가 있나? 혹시 여기 친구들이 장난친거 아닌가? 지난 설날에도 한번 우리집에 (어머님. 안녕하세요. 저 현재 애인인데요. 현재 내려왔죠? 제가 미안했다고 말좀 전해주시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전화가 와가지고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요 앞동네에서 찍은 여자한테 퇴짜맞고 괴로움에 몇마디 한 걸 녀석들이 바로 놀려 먹은 거였었다. 그때는 용이 애인의 짓이었다. "엄마. 혹시 서울말이 어눌하지 않던가요?" "아니. 아주 부드럽던데... 좀 떨긴 하더라." 부모님 앞에서 여자친구얘기는 어쩐지 어색하다. 이것들이 정말! 이번에도 제일 의심이 가는 건 오늘 당구이긴 용이 녀석의 애인이다. 장난이면 내일 죽어! 밤에 잠자리에 드는데 오늘 전화한 서울여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리고 며칠 만화방 그녀를 못봐서였을까. 그녀 생각이 많이 난다. 모래쯤 올라가야겠다. 만화방총각: 후후. 소설제목을 바꿔야 겠다. "애들은 가. 뱃가죽이 타는 밤."은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다. 그냥 "타는 밤"으로 해야겠다. 있어 보인다. 오후에 혜지씨의 모습에 힘이 없어 보인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바늘을 든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나의 어슬펐던 행동을 기억하고 있는건 아닐까? 미안하다. 나는 이제 다 잊어버렸는데... 오늘은 정경이한테 가지를 못했다. 어머니께서 오늘 저녁에 집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일까? 혹시. "혜지씨? 내일은 오전에 나와 주실 수 있으세요?" 그녀의 긍정적인 답을 받고 열쇠를 주었다. 일찍 문을 닫았다. 백수아가씨: 단골 그 녀석이 내 어릴적 그리운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놈이란게 믿기지 않는다. 철모르고 녀석에게 시집간다고 했던 그때의 내 맘이 사랑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난 그때의 기억을 첫사랑의 느낌이라 생각하며 지금껏 살아왔었다. 이상하다. 그냥 어릴적 친구라 생각하고 사귀어버려? 좀 분하고 추억에 대한 느낌이 깨져서 허탈했다. 그러나 내 맘은 그가 지금껏 어떻게 살았으며, 아직 나란 존재를 기억하고, 그런 나를 만나면 어떻게 대할까?라는 생각들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자취생: 엄마한테 내일 올라간다고 그랬다. "니. 어제 전화온 여자 때문에 일찍 올라 갈려고 그러는 거지?" "마지막 면접시험 공부해야지요."좀 뜨끔하다. 우리 어머니께서 떡을 만드시고 계시다. 분명 내일 내가 들고 갈 짐속에 저 떡이 들어있을 것이다. 내가 자기자식은 자식인가 보다. 점심때 친구들을 만나보았다. 지지배들한테 혹시 어제 우리집에 전화했었냐고 물어보았다. 모두들 배째란다. 아무도 그런짓 안했다고 했다. 그 전화 때문에 부모님께 낭패를 당했다고 했더니 "그래?"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무래도 애인없는 날 놀릴려고 장난친것 같은데 단서가 없다. 오후에 집에 혼자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받았는데 아무말 없다가 끊는다. 뭔가 느낌이 왔다. '녀석들이다.' 조금 있으니 또 왔다. "여보세요?...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또 왔다. "여보세요? ... 용이냐? 아니면 그 놈 애인이냐?" 네번째로 왔다. 또 말이 없다. 짐작이 가서 다짜고짜 말해버렸다. "난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래이~" "예?" 전혀 생각지 못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그 '예?'란 대답 한마디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야? 용이 애인목소리는 아닌것 같았는데... 다른 앤가? 만화방총각: 내 예상이 맞았다. 어머닌 내일 선보라고 하셨다. 내일 입을 양복을 건네 주셨다. 깨끗하게 드라이크리닝 되어 있었고. 그 속에 와이셔츠 또한 새것으로 깨끗해 보인다. "내일 점심때 **호텔앞에서 보자." 먹을것도 좀 챙겨주셨다. 그런데 별로 선보기가 싫다. 아침에 만화방 문열기 전에 양복을 입었다. 만화방은 좀 늦게 열었다. 혜지씨는 어제 내 부탁처럼 일찍 왔었다. 저번 일이 아직도 생각이 났을까? 어제 준 열쇠를 바로 건네준다. "오늘은 양복을 입으셨네요. 멋있네요." 혜지씨가 내 모습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 말이 별로 듣기가 좋지 않다. 난 지금 모르는 어떤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에... 어머니께 곧 말해야 될 것 같다. 백수아가씨: 만화방에 가니 이병씨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단정하고 멋있어 보인다. 처음 볼 때부터 이병씨는 보통의 만화방 주인아저씨들과는 조금 틀린 귀공자 느낌의 무언가가 있었다. 밖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당당해 보인다. 후후. 비교된다. 예전에 내 짐을 들어주고 뒤돌아선 녀석의 떨고 있었던 모습이 떠 올랐다.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감싸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만화방에 손님이 별로 없다. 심심하다. 단골녀석이라도 있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는건데.. 전화나 해볼까? 내 지갑 작은 쪽지에 그녀석 집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여보세요?" 앗 녀석같았다. 깜짝 놀라 전화를 끊었다. 다시 진정을 하고 한번 더 해보았다. 말씀하면 내가 누군지 알겠냐? 재밌네. 한번더 해보았다. 엥? 용이는 누구야? 겨우 세번에 화를 내네. 또 해보았다. "...너 용이지? 그래이씨. 내 애인없다. 너 잡히면 주거!" "예?"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놀라서 전화를 끊었다. 황당한 녀석의 대답을 듣고 무심결에 말이 나오고 말았다. 앞으로 녀석한테 전화할일이 생기면 예의를 갖추어야겠다. 잘못하면 맞아 죽을 것 같다. 그나저나 이녀석이 언제쯤 올라올려나? 자취생: 내일 또 서울로 올라갈려니 마음이 심난하다. 또 추억을 되짚으려 앨범들을 꺼내보았다. 즐거운 모습의 나를 보고 웃었다. 잘나온 사진들을 볼때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음. 이만하면 미남이군!' 졸업앨범들도 넘겨보았다. 잘나오지 못했다. 웃을걸 그랬는데... 유치원 앨범도 넘겨보았다. 그래 이때는 잘나갔었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항상 손잡고 다녔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릴때는 그 기억이 별로 떠오르지 않아 유심히 봐두지 않았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여자아이가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자꾸 생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내 기억은 바래져버렸다. 국민학교도 같이 들어갔었다. 그때 나이를 한살 더먹었다고 그애가 손잡고 가자는걸 뿌리치고 도망갔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그러나 기억만 있을뿐 그녀의 모습은 생각이 안난다. 누구였지? 내 사진 주위의 여자애들을 짚어보았다. '김정미, 박소영, 이지연, 정미자, 최혜지, 하이미, 홍주영,,,.' 에이,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만화방총각: 내앞에 한 여자가 앉아있다. 예쁘고 착해 보였다. 그러나 난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녀와 같이 있던 시간은 그렇게 길게 가지 못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정경이네 음반점을 찾아갔었다. "야. 오늘은 정말 멋있어보이네." "그래?" "어디 갔었어?" "응. 집에서 선보라고 해서?" "...그래? 그럼 선보러 가는 길이야?" "아니. 보고 왔어." "벌써? 어때? 맘에 들어?" "예쁘고 착해보이더라." "그럼 됐네. 잘하면 국수 얻어먹겠다." "허. 내가 여기 오는게 싫어?" "아니. 왜?" "야. 내가 장가가고 나면 여기 올수 있을거 같냐?" "그래서?" "혼자 있는게 싫다며." "그래. 싫어." "누구 나 말고 여기 오는 사람 있어?" "없는데..." "그럼뭐야?" "그래. 너 결혼하지말고 매일 여기나 찾아오곤 했음 좋겠다." 만화방에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선본 여자 맘에 들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저. 엄마. 전 맘에 둔 여자가 이미 있어요." 백수아가씨:밤에 이제는 완연히 녀석을 줄 작정으로 목도리를 짜고 있다. 괜히 웃음이 나온다. 옷을 말릴려면 제대로 말리지. 늘어난 목이 안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노크를 하셨다. "안자니?" "예. 아빠. 들어오세요." "어 뜨개질 하는구나? 요즘 젊은 애들 뜨개질하는거 참 보기힘든데.." "왠일이세요? 엄마는 주무세요?" "응. 혹시 초코파이 어디놓아둔지 아니?" "예? 그거 냉동실 안에 있을거에요." "그래? 고맙다. 참 그거 누구 줄려고 짜는거니? 혹시 나냐?" "호호. 죄송해요. 담에 꼭 아빠것두 짜드릴께요." "그래. 좀 섭섭하다. 잘자라." 아침에 일어나니 겨울까치의 울음소릴 들었다. 누구 반가운 사람이 올려나? 자취생: 아침부터 서둘렀다. 날이 밝을 때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서다. 먹을게 푸짐하게 든 박스가 탐스럽지만 또한 부담스럽다. 겨울 옷 몇가지를 넣은 옷가방을 포함해 짐이 모두 세개다. 에구 저걸 어떻게 다 들고가나? 여기야 아버지가 태워주면 되지만, 서울서는 좀 힘들겠다. 서울에 도착했다. 시간이 두시 반쯤 되었다. 빨리가면 혜지씨를 골목에서도 만날 수 있겠다. 택시를 잡는데 짐 때문에 태워주질 않는다. 목숨을 걸고 모범택시를 잡았다. 모범택시는 태어나 처음 타봤다. 아저씨가 내려 짐까지 실어준다. 좋네. 뒷자석에 앉았다. 꼭 사장이 된기분이다. 차비를 계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범택시를 탔건만 혹시나 하고 만화방 근처에서 내렸다. 후회했다. 그녀도 볼수 없었고 짐도 많이 무거웠다. 박스는 어깨에 메고, 내려 갈때 들었던 가방은 다른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옷가방을 들었다. 거의 우리집쪽 골목으로 꺽이는 부분까지 왔다. 맞은편에는 그녀가 사는 집으로 가는 골목이 있다. 한번 느껴볼까? 짐을 내리면 다시들고 가기가 힘들다는걸 알지만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 집쪽의 골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 그녀가 바로 앞에 서서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내 기분이 지금 뭘 훔쳐보다 들킨 기분이다. 그녀의 한손에는 뜨개질도구가 든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다. 계속 만화방에서 뜨개질을 했었나 보다. 만화방총각: 엄마가 오늘 아침에도 전화가 왔다. 내 마음에 둔 여자가 누군지도 물으신다. 뭐하는 애냐? 나이는 몇살이냐? 나한테 소개를 시켜야 되지 않냐? 많은걸 물으셨다. 하지만 난 자신있게 정경이를 소개시킬 수가 없다. 백수아가씨: 만화방 갈 시간이 다가 왔다. 오전내내 뜨개질만 한 것 같다. 목도리의 대상이 결정되고 나니까 한결 빠르게 진행이 된다. 이제 만화방을 가야겠다. 우리골목 끝자락에서 내 첫사랑이라 생각이 드는 사람이 보였다. 한쪽어깨에 든 박스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수가 없었고, 겨울 외투가 낯선 것이었지만 그 모습은 예전에도 본 모습이었다. 참 무거워 보이는데 잘도 들고 간다. 내가 여기서서 그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듯 그저 묵묵히 걸아가고 있다. 박스야 떨어져라. 아니면 미끄러져 넘어지던가? 그냥 내가 고함이나 질러볼까? 이제 그도 설레임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런 내맘이 전해졌을까? 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박스를 내려놓는다. 힘들었나 보다. 어깨에 걸친 가방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맺힌 내 모습이 추억되어 아름답다. "에..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했다. "에..예." "지금 올라오시나보죠?" "예.." "짐이 참 많네요?" "예." "뭐에요?" "그냥 옷하고 먹을거..." "무거워요?" "조금.." "제가 좀 들어드릴까요." "...." "안무거워요?" "아니 무겁긴한데... 만화방에 가는길 아닌가?" "조금 늦어도 되겠죠. 들어드려요?" "에. 예" "그 가방 이리주세요." "이건 좀 무거워요. 옷가방이나.." "아니 그 가방주세요. 별로 안무겁네요." 참 많이도 후회했다. 그나저나 이 무거운걸 어떻게 세개씩이나 들고왔냐? 가방을 힘겹게 들고 녀석을 따라 갔다. 우리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녀석의 자취방이 있었다. 녀석이 자기 방문을 열쇠로 열더니. "이제 이리주세요." "아니 안까지 들어드릴께요." "예?" 생각해보니 남자혼자 사는 방까지 들어갈려고 했다. "그럼 여기 놔 둘께요. 가보겠읍니다." 그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닫히지 않은 방문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지도 좁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지저분하지도 않는 그러나 포근해보이는 그의 방안에서 녀석이 방금 막 들고 들어간 박스를 힘차게 찢었다. 그리고 뭔가를 꺼내어 가지고 나왔다. "이거 드세요." "이게 뭔데요?" "떡이에요." "예?" "그때 보니까. 떡 좋아하시데요 뭐." 자취생: 무슨 말을 할까? 갑자기 그녀를 보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그녀가 먼저 인사를 해 주었다. 감격과 기쁨, 그 자체였다. 한여름 힘겨운 낮잠속의 덧없이 애틋한 그런꿈이 아니기를... 신이시여! 이것이 진정으로 꿈은 아닐런지요? 짐까지 들어준다고 했다. 긴장된 내 마음 옆으로 그녀가 내가방을 들고 걷고 있다. 이고 있는 박스의 무게와 들고있는 옷가방의 무게는 내 느낌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내 자취방에 너무도 빨리 오고 말았다. 아쉽다. 이제 그녀가 저 가방을 내려놓고 가버리리라. 근데 그녀가 무슨생각으로 내방까지 들어올려고 했을까? 좀 황당하다. 무언가 고마움의 표시를 해야겠는데... 떡! 참으로 맛있는 우리엄마가 손수 해주신 떡이 있었다. 예전에 그녀도 그 떡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 절 위해 이렇게 손수 떡을 만들어 주셨는데, 며느리한테 주신걸로 생각하십시오. 나도 이떡을 참 좋아하지만, 에라 다 줘 버리자. 비록 내가 떡을 먹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더 배가 부른 느낌이다. 만화방총각: 정경이를 부모님께 소개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 정경이가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결혼한 적이 있는 여자여서일까? 오늘 혜지씨는 덧없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훗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보다. "저.. 혜지씨?" "예?" "제 글좀 한번 봐주시겠어요." 난 좀 어색한 표정으로 공책을 보여주었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어떡하나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예? 아. 그 소설 다 쓰셨나봐요?" 별로 망설이지도 않는다. "제가 다시 읽어보고 어색한 부분 있으면 체크해줄까요?" 후후. 정경이의 음반점에서 그녀의 모습에 내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괜한 망설임을 하고 있지나 않나 해서다. 백수아가씨: 이병씨가 만화방을 나가기까지 떡봉지를 꺼내 놓지 않았다. 예전같으면 꺼내놓고 먹어보라고 말했을테지만, 왠지 주기가 싫다. 나만 먹고 싶었다. 이병씨가 그때 내맘을 아프게 했던 공책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라고 주었다. 그래 내가봐도 수정해야 될 부분이 많아 보였다. 다시 그 공책 읽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울 줄 알았는데, 다시 설레이는 맘 때문에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설레이는 마음은 이 공책의 주인때문이 아니었기에... 주위 눈치를 살피며 떡을 몇개 꺼내 먹었다. 요조숙녀라 자부했던 내가 이게 무슨꼴이냐? 꼭 달빛에 뭘 훔쳐먹는 도둑고양이 모습이다. 녀석이 안온다. 올것 같았는데... 자취생: 방안에서 짐정리를 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만화방에 가야지. 조금전에 그녀를 보았는데 지금 가면 너무 이르고 또한 티내는거 같다. 한 삼십분만 있다가 가자. 내려갈때 개고 간 내 이불위에 등을 붙였다. 아까의 일들이 나를 설레게 하고 있었다. 그녀와 난 손을 잡고 있었어요. 그녀는 어린 소녀의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며 웃었습니다. 주위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무릎밖에 오지 않는 시소와 내 키보다 작은 그네였지만 우린 그걸 재밌게 타고 놀수가 있었습니다. 일어나니 밤 8시가 넘었다. 몽롱하고 아련하다. 좀 피곤했었나보다. 야이 바보야. 오늘이 그녀와 길게 대화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옆에 먹을게 많아서 나를 용서했다. 만화방총각: 밤에 손님이 있었지만 정경이에게 전화를 해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와의 전화를 끊고 만화방문을 닫을 즈음 전화가 왔다. 아버지였다. 어디다 전화를 하느라 그렇게 통화중이었냐고 물으신다. 만화방 경영하는게 싫냐고 물으셨다. 또 새해가 되면 아버지 회사에 같이 나가는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망설여진다. 이제 이 만화방에 정이 들고 있는데... 다음에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백수아가씨: 집에와서 나갈때보다 풍성해진 종이가방 때문에 우리 어머니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하시었다. 결국 떡을 발견하셨다. 우리 아버지 저녁도 마다하시고 그 많던걸 다 드실려고 한다. 악착같이 붙어 한접시 얻어 왔다. 만화방에서 먹은것까지 쳐도 서너개 밖에는 먹지를 못했다. 지금 접시에는 작은 꽃떡 십여개가 남아 있다. 먹음직스럽다. 그러나 녀석 생각이 났다. 녀석의 어머님이 자식줄려고 정성들여 만드신것 같은데, 그리고 녀석이 가지고 온 떡을 모두 준 것 같았다. 입맛만 다시고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이병씨가 적은 공책을 읽어보았다. 몇장 찢겨져 있었다. 상당히 유치할줄 알았는데 결말부분으로 갈 수록 차분해지면서 애틋한 감도 없지 않다. 물음표 지워진 내이름과 느낌표가 여러개 찍힌 정경씨의 이름을 보았다. 이건 모르고 찢지 않았나보다. 어색한 부분에 줄을 그어주고 몇자 적어주었다. 그리고 또한 글자 틀린부분도 수정해주었다. 근데 이 소설을 왜 지었을까? 자취생: 일어났다. 상쾌하기 그지 없다. 아침에 굶지 않아도 될 먹을것이 있고, 또한 그리운 사람이 근처에 있다. 힘차게 밖으로 나와 찬공기 속에 운동삼아 날라차기 한번했다. 하하. 꽁꽁 언 길바닥위에서 한 것이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처럼 내맘이 날고 있었다. 만화방총각: 단골녀석이 아주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점심 먹고 바로 왔나보다. 휴지를 주며 얼굴에 묻은 음식자욱을 지우라고 했다. 녀석은 항상 즐거운 모습이다. 그래 밝은 모습이 가히 보기 좋다. 3시까지 기다리기가 그렇다. 그래 이녀석이 혜지씨 친구라고 했지. 어차피 혜지씨 올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혜지씨 올때까지만 만화방을 부탁하고 그녀석 시간표에 시작시간을 3시로 해주었다. 한시간 가까이 면제해준 셈이다. 정경이에게 갔다. 그녀도 밝은 모습이다. 정경이의 이 밝은 모습을 평생 보고 싶다.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있고. 난 그의 옆에 앉아 있다. 분위기 좋은 음악도 흐른다. 내 마음이 점점 굳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언제 한번 부모님께 소개시키자. "정경아." "응?" "부모님이 자꾸 선보라고 그러는데 어떡하지?" "뭘?" "자꾸 선보라고 그런다니까?" "봐라." '우쒸. 으이그 내 맘도 모르는 여자야.' 오늘은 그냥 돌아 갈랜다. 백수아가씨: 아하 춥다. 만화방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탐스러웠다. 안녕하..어라? 저녀석이 왜 카운터에 앉아 있지? 뭘 빤히 쳐다보냐? 내가 왔으면 벌떡 일어나야지. 쿠쿠 멀뚱 멀뚱 쳐다보는 녀석의 모습에 유치원 앨범 그 꼬마가 생각이 난다. 녀석이 안녕하시오.라고 말하고선 지자리를 찾아갔다. 내 자리를 되찾았다. 짐정리를 했다. 이병씨가 준 공책은 옛날 있던 자리에 넣고, 뜨개질 도구는 그 한쪽옆으로 놓았다. 자리가 참 따뜻하다. 들고온 접시의 랩을 걷어냈다. 녹으면 어제처럼 쫀득해지겠지. 쿠쿠 녀석 오늘은 어인일로 나보다 일찍왔냐... 뜨개질을 했다. 떡이 빨리 녹아야 녀석한테 갖다 줄텐데... 녀석이 또 자버리면 어떡하지? "이거 드세요. 어제 그쪽이 준 떡이에요." "예? 아. 맛이 없던가요?" 녀석이 날 올려보더니 물었다. 별로 못먹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참 맛있게 드시더라. "아네요. 맛있었어요." "그럼 혜지씨가 드시지..." "아니에요. 집에가면 아직 남아 있어요." "그래요. 그럼 감사히..." 그가 떡을 하나 입에 넣고선 아직 그앞에 서있는 날 올려보았다. "에 그래도 이거 한개만 드셔볼래요?" 그가 이수시개에 꽂아 하나 건네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몇명있었지만 난 그걸 입으로 받아먹었다. 한번 얼었다가 녹아진 떡이었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내자리에 앉아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 조그맣던 녀석이 이제는 나보다 훨씬 커버린게 신기했다. 떡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녀석의 목을 보며 지금짜고 있는 목도릴 들어 대보았다. 후후 어울릴것도 같다. 자취생: 오늘은 다른날보다 상당히 일찍 만화방으로 갔다. 만화방아저씨가 대뜸 날 보더니 휴지를 준다. 아까 먹었던 우리엄마의 생김치 때문에 입주위에 벌겋게 뭔가 묻어있었다. 고맙군. 다음에 내 사례를 하지. 만화방을 봐 달라고 했다. 혜지씨 올때까지만... 신났다. 혜지씨가 앉던 자리에 앉았다. 하하. 그녀가 오면 무슨말을 하지? 곰곰히 생각을 해보며 즐거워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나타났을때 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떡을 건넸다. 맛이 없었나? 얼마나 맛있는데! 하나 먹어보니 그렇게 느낄수가 있었다. 안먹어보았나? 이 맛을 확인시켜주고 싶어 하나 건넸다. 손으로 받을 줄 알았는데, 입으로 받았다. 허허 이럴수가... 너무 오래본거 같다. 아무리 그녀가 좋다지만 일어설때는 일어서야지. 티켓을 건네고 계산을 할려고 그녀 앞으로 갔다. "벌써 가시게요?" " 예? 두시간도 훨씬 넘게 봤는데..." "아. 그러세요. 티켓은 3시에 온걸로 되있는데..." "에이 두시도 안되서 왔단 말이에요. 자기 올시간에 맞춰서 온게 아니란 말이에요." 왜그랬을까? 왜그랬을까? "호호. 나 잘 모르죠?" "예?" "내가 누군지 모르겠죠?" "예? 이름이 혜지란건 아는데요. 에..나이도" "아니에요. 천오백원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