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방총각: 만화방에 돌아오니 혜지씨가 미소지으며 뜨개질을 하고 있다. 아마 저 뜨개질의 주인공을 생각하고 있나 보다. 누굴까? 혜지씨가 글 잘 읽었다면서 글자 틀린거랑 어색한 부분에 토를 달아 놓았다고 했다. 내 글의 느낌이 어땠을까? "괜찮네요. 그런데로 성(性)에 대해서 주관이 잡혀 있더군요." "하하. 그래요?" "취미로 글을 쓰시는가 봐요. 경영과 나오셨다고 했잖아요." "그냥. 내 책한권 내고 싶어서요. 이거 책으로 출판해도 괜찮겠어요?" "..." "별루에요?" "그게 아니라, 그 공책 한권 분량으로 책이 만들어질까 해서..." 그랬다. 난 가장 큰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공책 40페이지정도의 분량으론 아무리 그림을 잡아넣고 다른 어떤짓을 해도 책으로 만들어지기 힘들겠다. 백수아가씨:녀석이, 아니다 이제 현재라 불러주어야겠다. 한시간정도 지나니까 나갈려고 했다. 접시의 떡은 깨끗이 치워져 있다. 쿠 쿠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온게 아니래. 어쩐지 예전에 내가 여기 만화책 보러올 때부터 눈에 띄더만.. "아니에요. 천오백원만 주세요." 그래 알리가 없겠지. 어쩌면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때를 기억못할지도 모른다. 괜한 말 하지 말자. 이병씨가 왔을 때 그가 무엇 때문에 그 글을 쓰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주 단순한 문제를 그는 몰랐던 거 같다. 책이라... 국문학도였던 나도 아직 그런 생각을 못해봤는데... 나도 글이나 쓰는 건데 그랬다. 그런 꿈이라도 품고 산다는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거 같다. 이병씨 그는 꿈처럼 살 수도 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 자취생: 에이, '나 알아요?'도 모자라서 이제는 '나 잘 모르죠?'다. 어떻게 보 면 그녀는 나에게 참 다정한 것도 같은데, 또 한편으론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 난 당신을 잘 모른다. 그래서 자꾸만 다가서고 싶다. 만화방총각:밤에 정경이와 전화를 했다. 이제는 일상처럼 그녀가 내 곁에 있 다. 일상이란 잘 못느끼다가도 그것이 깨져버릴 땐 상당한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찾아온다. 백수아가씨: 드디어 성탄절이 이번주 금요일로 다가왔다. 올해는 산타할아버지 가 무슨 선물을 나에게 안기실까? 내가 올해 착하게 살았나? 후. 그렇게 착하게 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쁜짓도 하지를 않았다. 단단한 줄에 메달린 풍선같은 것이라도 받았음 좋겠다. 거리의 크리스마스 캐롤이 이 아낙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구나. 자취생: 우쒸. 면접일자가 연기됐다. 이 회사는 심심하면 연기다. 졸업하기 전 에는 진로가 결정되어야 하는데... 성탄절엔 집에 내려가서 친구들과 놀까? 아니면 이 골방에서 티비나 볼까? 분명히 작년같았으면 집에 내려가 친구들과 성탄절을 보내고 싶었겠지만 올해는 어이해 이렇게 내려가기가 싫을까? 만화방총각: 거리에 성탄절 분위기가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정경이의 음반점에서 캐롤이 난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정겹다. "정경아!" "왜?" "흠. 너 우리 부모님 한번 만나볼래?" "내가 왜?" "응. 자꾸 선보라 그래서 맘에 둔여자가 있다고 그랬더니, 소개시켜 달라고 하 더라." "훗." "왜? 싫어?" "이거 지금 프로포즈 맞지?" "어... 그렇네..하하" "싫어." "...으이씨. 너 내가 싫은거야?" "아니." "그럼 뭐야? 그냥 친구인거야." "아니." "내가 말이야. 널 옛날에도 사랑하고 있었던거 아니?" "후후. 난 지금도 그런데." "정말?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렇구나. 그런데 왜 싫어?" "몰라서 물어? 더이상 초라해지기가 이제는 싫어." 몰라서 물었다. 그냥 나따라 우리집에 가서 부모님 만나보면 되는거지. "어떤 부모가 이혼한 여자 데려와서 이 여자하고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는걸 좋아 하겠니." "너네 부모님의 난처한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냥 좋은 사람이다. 싶으면 마음을 줘라. " 한참만에야 난 입을 뗄 수가 있었다. 엄마의 모습이 날 많이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게 자신이 없는거니. 내가 옆에 있을건데." "호호. 너 착각하고 있구나. 널 사랑하지만 네가 내 마음속에서 대단한 존재는 아니야." "우쒸. 나 갈래. 내일 다시 올께." 백수아가씨:오늘은 현재가 오지를 않았다. 만화방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 지는데, 내 맘은 좀 허전하다. 이병씨도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저녁 8시가 지나서야 집에 가서 잘테니 만화방 잠궈놓고 가라는 전화가 왔다. 사람들도 별로 없다. 목도리가 이제 거의 완성이 되어간다. 녀석에게 이걸 줘, 말어? 자취생: 청담동 가로수에 많은 불빛들이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곳곳에 성탄절을 축복하는 음악이 새어나오고 있다. 오늘은 만화방에 가지를 않았다. 겨울 양복 한벌 사러 나왔다가 거리풍경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 많은 연인들이 즐거운듯 가로수 불빛들을 그들의 눈망울에 담고 있었다. 갤러리아 백화점 쪽으로 올라오는데 참 신선하게 눈 안에 들어오는 무엇을 보았다. 내 자취방보다 큰 유리창속에 은은한 빛으로 감싸인채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혜지씨보다 덜 예쁜 마네킹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헤~ 그래도 예쁘다. 그리고 졸라 비싸겄다. 그 앞에서 잠시 명상에 잠겼다가 발걸음을 계속 백화점쪽으로 재촉했다. 백화점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임에프시대 맞어? 그냥 점원이 어울린다고 거짓말 친 양복을 한벌 사서 백화점을 나올려고 했다. 일층이다. 내 책상보다도 작은 유리관 안에 참 혜지씨한테 어울리겠다 싶은 핑크빛 손장갑에 눈길이 갔다. 아직 내 차가왔던 손바닥에 닿았던 그녀의 두손가락, 그 따뜻한 느낌을 난 잊지 못하고 있다. "이거 얼맙니까?" "16만 5천원입니다." 뜨악! 원래 여자 장갑은 그렇게 비싼가? 저 조그마한게 내 양복 반값이다. 그냥 집에가자. 울엄마가 저걸 사서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선물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꺼이꺼이 우실까? 버스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 비싼거라 그런지 포장이 예쁘다. 그나저나 이번 성탄절은 짤없이 내 골방에서 티비나 봐야겠구나. '미쳤지! 내가.' 백화점 현관을 나오는데 떨이로 목도리를 팔고 있었다. 내 목이 허전한데 잘되었다. 7000원 짜리 하나를 샀다. 그런데 그순간 목도리같은 걸 짜고 있던 그녀의 하얀손이 다시 떠올랐다. 다음달 한달은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야 겠다. 만화방총각: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내가 마음에 둔 여자가 이혼녀라고... 항상 내 편일 것만 같았던 아버지도 나보고 미쳤냐고 했다. 밖에 내놓았더니 네가 외로움을 타서 그런거라며 내일이라도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신다. "진정으로 이혼녀는 안되겠습니까?" 돌아앉은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다. "니가 뭐가 아쉬워서... 니가 못난게 뭐냐?" "취직도 못해서 부모님 의지해 만화방하는 내가 잘난 건 뭡니까?" "훗. 새해가 되면 내 바로 취직시켜주마. 넌 취직 못한 게 아니야." "알았습니다. 다른 여자 찾아보겠습니다." 백수아가씨: 어라? 만화방문이 닫혀있네. 열쇠를 안가지고 나갔었나? 내가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용하다. 그냥 나갈려고 했는데... 쿠쿠 녀석이 왔다. 바로 내 첫사랑... 근데 목도리는 왜 하고 온 거야? 내가 이걸 주기가 좀 그렇잖아. 내일쯤이면 완성될 것 같은데... 저녀석 만화책 다 볼 때까지만 내가 만화방 주인행세를 하지 뭐. 자취생: 오늘은 만화방에 한동안 손님이라곤 나 혼자였다. 만화방이 예전처럼 그렇게 따뜻하질 않았다. "현재야. 아니 현재씨 커피한잔 할래요?" 저 아가씨가 지금 뭐라 그러는거야? 그때 라면 끓이던 그곳에서 물을 끓이다, 뭔 뜬금없는 소리더냐. "어이. 커피 한잔 안할래요?" 나? 목도리로 목을 감아 눈 밖에는 안보였겠지만 그녀는 내 표정에서 "나? 저말입니까?"라는 걸 읽었나보다. "여기 누구 다른 사람 보여요?" 헤~ 그럼 앞에 현재는 내 이름이었단 말이지. 보던 만화책을 팽개치고 그녀가 있는 카운터 안으로 쫄래쫄래 다가갔다. 햐. 라면은 못끓이더니 커피는 기가 막히네. 별로 많은 대화는 못했지만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갈때 그녀가 또 뜬금없는 말을 했다. 그것도 분명 내가 듣기에 반말이 었다. "나 정말 모르겠니?" 만화방총각: 어머님을 설득시키는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버지도 그럴 줄은 몰랐다. 아주 낯선 표정을 보았다.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에 편지한장 남겨두고 집을 나왔다. '집에 들어오겠습니다. 잠깐 바람좀 쏘이고 올께요.' "정경아." "또 왜?" "어제 우리 부모님께 네 얘길 했어." "후후, 그래? 뭐라 그려셔?" "관심은 있나보다?" "아니 별로..." "아주 딴사람들 같아 보였어. 나보고 미쳤냐고 그러던데.." "흠. 쯔쯧 괜한 짓을 했네..." "그래. 괜한 짓 했지. 그래도 맘은 편하다." "뭐가?" "부모님 말씀에 따르기로 했거든." "그래 잘했어." "근데, 너한테 장가가겠단 마음은 굳어졌어." "체. 네맘대로구나." "너 정말 나한테 시집올 생각없냐?" "없는데..." "정말?" "..." "말이 없군. 정말 싫은가 보구나. 네가 그냥 좋다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난 각오가 섰는데." "..." "쩝. 할 수 없군." "야이 바보야. 그렇게 모르겠니! 난 니가 모르는 한남자의 여자였었단 말이야. 이미 순결을 그 남자에게 바친 여자란 말이야. 그런 나를 니네 부모님들이 좋아 할 것 같애?" "너 우리 부모님하고 살거니?" "내가 이혼녀인데도 너는 내가 좋니?" "그래 좋다." "내가 순결을 잃었는데도? " "여자들도 순결이라는 걸 따지는구나. 풋 그게 뭔데? 그래... 그 순결이라는거 나하고 기억을 공유한 시간만은 지켜주길 바래. 하지만 과거의 페이지는 넘겨졌어." "...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이제 새로운 종이 위에다 내이름만 쓰면 되는 거란 말이지." "후훗. 그말은 더 모르겠는데?" "하하. 내 소설마지막에 썼던 말이야. 하하하." "그냥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 버렸네. 이게 아니잖아." "그렇네. 에 나 집나왔어. 어디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데..." "흠... 나랑 같이 갈래? 멀리... 따뜻한 남쪽으로..." "그래. 넌 내맘을 이제야 아는구나. 새해는 따뜻한 남쪽에서 볼까?" "그럴까? 성탄절은 어디서 보내지?" "어느 낯선 고장의 성당은 어떨까?" "그것도 괜찮겠다. 그럼 나 준비하러 집에 갔다올테니까. 가게좀 봐줘." "지금?" "그럼 아니야?" "빨리 다녀와." 백수아가씨: 만화방 안이 조금 춥지만 조용한게 좋다. 녀석이 목도리를 돌돌 말고 저기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다. 커피나 한잔할까 싶다. 물을 끓이는데 전에 녀석과 함께 여기서 라면끓였던 기억에 웃음이 나온다. 만화방 안에 녀석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니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커피할래? 라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하마터면 반말을 쓸뻔 했다. 그냥 별말없이 녀석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커피만 홀짝거렸다. 초등학교 일학년때 내 손을 뿌리치고 다른 남아들과 어디를 가버릴 때의 모습보다 더 어색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세월의 잊혀짐이 담겨 있었다. "나 정말 모르겠니?" 혼잣 말로 한다는게 입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녀석이 바로 대답을 할려다 말을 얼버무렸다. 언젠가 알게 될 수도 있겠지. 녀석이 나갔다. 나도 가야지. 녀석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아주머니가 왔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시는게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다. "아가씨는 여기서 뭐하는거에요?" "예? 누구신지?" "나 이병이 에미되는 사람인데... 이병인 어디갔어요?" "예. 안녕하세요. 잘 모르겠는데요." "아가씬 여기서 뭐하는거냐니까요?" "그냥 아르바이트생인데요." "이병이가 좋아한다는 그 여잔가?" 그 아줌마가 혼자하는 말을 들었다. "아가씨 결혼했었어요?" "아니요." "그럼 됐고, 이병이 여기 없어요?" "예. 아침부터 없었나본데요." "알아요. 아침에 여기 와 봤으니까." "혹시 돌아오면 집에 연락좀 하라고 해요." 이상한 아줌마야. 그나저나 이병씨가 어디를 갔을까? 자취생:집에와 그녀에게 선물할려고 산 장갑의 포장을 보았다. 모레가 이브다. 그날 주어야 되겠다. 왜 자꾸 자기 모르겠냐고 물어보는거야. 뭐라도 가르쳐줘 야 될 거 아니야. 백수아가씨: 야호. 드디어 다 만들었다. 현재가 만화방에 찾아오면 주어야 겠다. 근데 어떻게 주지? 기회가 생기겠지. 오늘은 모처럼 화장을 하고 만화방에 나가봐야 겠다. 녀석이 준 립스틱이 시집가는 아낙처럼 내 화장대 위에 부끄럽게 서있다. 어라? 오늘도 만화방을 열지 않았네? 연락도 없이 이병씬 어디를 갔을까? 어제처럼 내가 문을 따고 들어갈까? 하지만 어제 찾아온 이병씨 어머님의 모습이 그런 맘을 지워버렸다. 그냥 앞에서 기다려보자. 녀석이 곧 나타나겠지. 자취생: 어라? 만화방이 잠겨 있네. 오늘은 노는 날인가? 에이 그럼 오늘은 그녀를 못보는 거여? 학교나 가보자. 도서관에서 커피나 한잔 하고 돌아오면 혹시 만화방 문이 열렸을지도 모르지. '으이 쓰. 분명히 밀크커피를 눌렀는데, 이러니까 네가 150원짜리 밖에는 안되는 거야 응?" 하필 아는 놈을 만나가지고 도서관 안에서 좀 놀았다.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도서관 안이 텅 비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만화방은 여전히 빛을 잃은채 닫혀있었다. 내일도 안열면 안되는데... 백수아가씨: 으..추워라. 이녀석이 보통 이때쯤이면 만화방에 왔는데... 도저 히 안되겠다. 집에 가서 두터운 외투라도 걸치고 와야겠다. 조금 낫군. 그녀석 줄려고 짠 털목도리를 포장한 종이가 구겨진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팔사이에다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털목도리를 들고 있는 손이 시립다. 이녀석은 왜 빨리 안나타나는 거야. 벌써 두시간째다.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집쪽에서 참 낯이 익은 모습이 나에게로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나를 참 잘 만났다는 표정이다. "너 거기서 뭐하냐. 잘 만났다. 나하고 저녁반찬 사러가자. 들고 있는 거는 또 뭐냐?" 오늘은 녀석을 못만나나 보다. 엄마를 따라 시장이나 가야겠다. 포장지가 다 구겨졌다. 다시 포장해야지... 자취생: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이 밝았다. 창가에 나리는 빛이 그녀에게 줄 선물포장지의 빛으로 반사되어 긴장되게 한다. 새로 산 양복을 입고 갈까? 관두자. 빨리 오후가 되어야 할텐데... 오늘은 만화방문을 열겠지? 오후 세시쯤 되어 내 방을 설레는 맘으로 나왔다. 이 선물을 주고 어쩌면 내일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하. "안녕하세요." "어? 그래 또 만났네." 만화방을 가다가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다. 여전히 아버님은 나를 아는체 하신다. 진짜로 알고 그러시는지 의심은 가지만 항상 즐겁게 인사를 받으시는 모습이 혜지씨 모습처럼 좋다. 어라? 오늘도 만화방문을 열지 않았네? 어떻게 된거야? 이럴줄 알았으면 그날 선물 산 다음날 줘버리는 건데 그랬다. 애고, 날씨가 춥다. 벌써 세시간째다. 이제는 날까지 어두워졌다.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는 이대로 끝이 나버리는 건가? 야 너? 너 목도리 맞아? 하기야 7000원짜린데 뭘 더 바라냐? 바람이 막 들어온다. 배도 고파왔다. 안되겠다. 집으로 그냥 들어갈려다 그녀의 집쪽으로 한번 가보았다. 그녀의 집은 날이 깜 깜해졌는데도 어디에도 불빛이 켜져 있지 않았다. 어딜 갔나? 백수아가씨: 오늘도 만화방 문을 열지 않았으면 녀석 자취방으로라도 찾아가야지. 어제처럼 기다리지는 못할 것 같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추웠다. 만화방으로 갈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빠가 돌아오셨다. 오늘은 왠일로 일찍 돌아오셨지? "혜지야 너 오늘 약속 있니?" "아니요. 왜요?"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잖니." 새삼스럽게 뭘. "오늘 우리식구 외식시켜줄려고 내가 이렇게 일찍 오지 않았냐?" "에? 나 지금 어디 가봐야 되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어머니의 아주 무서운 눈빛이 나를 쏘아 보았다. "잠깐만요. " 혹시 몰라서 만화방에 전화를 해보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오늘도 만화방은 문을 열지 않았나보다. "그래 엄마. 어디 안나갈께요. " 우리 엄마 참 굼뜨신다. 아줌마가 꾸미면 얼마나 꾸미시겠다고 저러실까? 오랜 만에 외출하는게 참 즐거우신가 보다. 나도 정장차림으로 예쁘게 꾸몄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은 가족과 함께. 차고에서 아주 오랜만에 우리집차가 꺼내어졌다. 우리 아버지 기름값 아끼실려고 몇달전부터 출퇴근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셨다. 우리 엄마 면허증없으시다. 나? 나야 물론 없지. 오랜만에 아빠차를 타고 우리집 식구가 외식을 하러 외출을 했다. 앞좌석에 앉은 우리어머니 "혜철인 지금 이 추운데..."하시며 눈물을 글썽거리신다. 그놈 제대할 날도 이제 얼마 안남았구나. 만화방을 지나쳐 가는데 닫힌 만화방앞에서 떨고 있는 녀석을 보았다. 자기 도 막막한가 보다. 한손엔 또 무언가 들고 있었다. 논현동 TGI로 갔다. 오늘따라 사람이 많아서 예약을 하고 기다려야 했다. 그냥 갈비나 뜯어러 가지 우리엄마 분위기 내고싶다 하여 어쩔 수 없이 한시간 가량 처량하게 우리식구 셋 대기실에서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연인들이 참 많았습니다. 나는 보기 좋은데, 우리엄마 참 많이도 혀를 차셨습니다. 그러길래 갈비나 뜯어러 가자니까. 나도 솔직히 저런 연인들 모습 배아파서 못보겠다. 자취생: 에구에구 서러버라. 이 좋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난 추위에 떨며 3시간 이 넘게 닫힌 만화방 문앞을 지켰고 3시간 가까이 불꺼진 혜지씨 집 앞에서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다. 홀로 말이다. 처량하고 불쌍하고 춥고 배고프고 다리도 아프다. 어머니~! 집에 내려가 따뜻한 밥에 따뜻한 방에서 비디오 보던 기억이 그립습니다. 흑흑... 그런데 내려갈 차비가 없습니다. 빨갛게 바래져 버린 내 손에 들려진 조그만 종이가방에 서럽게 눈이 갔다.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티비에서는 뉴스를 하고 있었다. ''''''''거리의 밝은 조명등 아래로 사람들의 모습이 즐겁군.! 이번 크리스마스도 덧없이 가겠구나. 오늘은 특선프로 뭐하나?'''''''' 오늘 내가 왜 오기에 가깝게 선물하나를 줄려고 그녀를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그래 올해가 내 마지막 대학생활이구나. 모르겠다, 오늘 그녀를 만났으면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길것만 같았기 때문이라 접어두자. 백수아가씨: 두시간을 기다려서 두시간동안 저녁을 먹었다. 우리 어머니 기다린 시간 동안은 앉아있다가 가야된다고 하셨다. 본전뽑기의 투철한 정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우리집 골목으로 꺽이는 곳에서 전조등 불빛에 힘없이 걸어가는 누군가가 비추어졌었다. 방안이 조금 싸늘하다. 곧 따뜻해 오겠지. 녀석이 왜 우리집 골목쪽에서 풀이죽은 모습으로 나왔을까? 설마 나를 찾아서 우리집 앞으로 왔던 건 아니었을까? 녀석은 만화방 앞에서 그를 보았을 때처럼 한손에 무언가 들고 있었다. 녀석을 줄려고 짠 목도리의 포장이 구겨져 보기가 애처롭다. 다시 포장해야지. 성탄절 아침이다. 친구한테 전화가 왔었다. "야이 지지배야 오늘 할 일 없지?" 그래 지지배야 할일 없다. 오후에 바람이나 맞으러 가자고 한다. 오늘 같이 흥겨운 날은 거리에만 나가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오늘 같은 날은 백조들도 우아해 질 수 있다며 날 격려차 놀렸다. "싫어 지지배야." 오전 9시가 넘었다. 난 지금 화장대의 작은 거울 속에서 화장한 내 얼굴의 입술이 노을빛으로 물드는 걸 보고있다. 그리고 내모습이 어제처럼 정장차림은 아니지만 아껴두며 입지 않았던 얼마전 엄마가 사주신 겨울옷으로 감싸져 있다. ''''''''호호. 아직 괜찮은데...!'''''''' 거울속 옷맵시를 보았다. 쿠쿠 어디 멀리가는 것도 아닌데 너무 치장하는게 아닌가 모르겠다. 후웁 호흡을 가다듬었다. 좀 긴장이 되는건 사실이다. 노크를 했다. 기척이 없다. 다시 노크를 했다. "누구세요?" 별로 다정한 어투가 아닌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나와 주실 수 있으세요?" 녀석이 예전에 본 에이스벤추라의 머리 에 밝은 빛에 눈을 가늘게 껌벅거리며 자취방 문을 열었다. 잠이 덜 깼는지 이렇게 예까지 찾아온 나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한참동안 눈꼽낀 눈이 나를 껌벅거리며 보고 있다. 뭔가 흠찟 놀라는 표정이다. 이제서야 나를 알아봤다는 뜻이리라. "아니, 여기는 어쩐일로?" 훗 집에서 입는 옷은 목이 더욱 늘어져 속옷이 악세사리처럼 바깥으로 내비쳤다. "풋. 뭐 줄게 있어서요. 이거 받아요." "이게 뭔데요?" "나중에 뜯어 보면 되잖아요." "이걸 왜 나한테...?" "늘 이때까지 자나봐요?" "..." "나가 볼께요." "아..예." "에, 오늘이 무슨날인 줄 알죠?" "예. 저 오늘만 늦잠 잔거에요." "푸.. 나가볼께요." "아..예" "참 식사는 하셨어요?" "지금 일어났는데요." "아. 그렇지..." "이거 주시려고 여기까지 온거에요?" "음. 오늘이 성탄절이잖아요." "어디 가세요?" "집에 가야죠." "그럼 어디 갔다 오셨어요?" "왜요?" "그냥. 옷차림이...아 맞다. 잠시만 기다려봐요." 녀석이 후다닥 문을 닫더니 또 후다닥 나왔다. 선물같은 걸 나한테 준다. 어제 그의 손에 들려있었던 작은 종이가방이었다. 이제야 어제 그가 힘없이 우리집 골 목쪽에서 걸어 나온 이유를 알겠다. "이거 가져가세요." "이게 뭔데요?" "나중에 뜯어보면 되잖아요." "이걸 왜 나한테?" "에..오늘이 성탄절이잖아요." "그래도...?" "응... 예전에 내가 립스틱 줬잖아요?" "예 그런데요?" "별로 맘에 안드시나 봐요? 바르고 다니지 안잖아요?" "예? " "그래서 다른거 하나 샀어요." 뭔소리를 하는거야? 내 입술에 한손가락을 대고 말했다. "지금 제 입술에 뭐 발랐죠? 이거 현재가 준걸로 바른건데..." "...에? 내가 준건 거무죽죽한건데..." "근데 정말 이거 뭐에요?" "오늘 어디 안가요?" "치. 그래 갈께요." "아..아니. 잠깐만요." "왜요?" "에 오늘이 성탄절인데..." "그래서요?" "혹시 어디 안가면..." "왜? 어디 저랑 같이 가게요?" "에. 예." "어디를요?" "그냥 성탄절이니까." "몇시에요?" "세시쯤 만화방 앞에서 볼래요?" "세시쯤 만화방 앞에서요?" "에..예." "후후. 알았어요. 그럼 그때 봐요." "저기요?" "왜요?" "이거 뭔지 모르지만 고마워요." "그쪽도 이거 고마와요. 안녕히.." "저기요?...꼭 나와야 돼요." 자취생: 아침에 나의 늦잠을 깨운 음성은 다름아닌 그녀의 음성이었다. 내 묵 은 방안의 공기 속에 상쾌한 아침 찬공기와 들어온 건 그녀의 환한 모습이었다. 난 지금 그녀가 예전부터 직접 뜨개질한 목도리를 껴앉고 울고있다. 슬퍼서가 아니고 너무 기뻐서다. 만화방에서 참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는 하얀 손을 미소처럼 움직여 그 고운 털실을 목도리로 바꾸어 갔었다. 그 목도리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니, 너무 감격해서 우는 것이다. 난 이 목도리만 받은 것이 아니다. 그녀가 이 목도리에 담았던 시간과 기억도 함께 받은 것이다. 흥얼거리며 난 기대되는 외출준비를 하고 있다. 면접 때문에 샀던 겨울 양복을 과감히 입었다. 음 있어 보인다. 겨울 양복에 털 목도리가 참 잘 어울려 보였다. 하지만 난 목도리를 하고 나가지 않았다. 오후 세시에 닫힌 만화방 앞에서 그녀와 난 만났다. 백수아가씨: 그가 나에게 준건 내 마음처럼 핑크빛으로 물든 가죽장갑이었습니다. 내손에 꼭 맞더군요. 하지만 난 그 장갑을 끼고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도 나처럼 내가준 목도리를 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와 나는 문이 닫힌 만화방 앞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크리스마스를 느끼러 간 곳은 아직 어둠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온통 별빛으로 물든 청담동 거리였습니다. 지금 내옆에 어릴 때처럼 녀석이 걷고 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녀석의 팔 안쪽에 팔짱을 껴보았습니다. 그는 추억으로 묻어둔 그시절 내손을 뿌리칠 때처럼 어색해하며 혼자서 가버리더군요.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그런 녀석의 모습이 귀엽게 보였습니다. 아주 맑게 닦여진 커다란 유리공간 속에서 생명없는 한 여자가 너무도 흰 드레스를 입고 축복같은 조명을 받으며 서있었다. 녀석은 또 어색해하며 어디를 가버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난 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녀석의 손은 예전에 한번 느꼈던 것처럼 차가웁지가 않았습니다. 또 손을 뿌리칠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도 내일이면 추억 속으로 가버릴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자취생: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날 위해서 그녀가 제법 오랜시간 이 목도리를 짠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너무 잘생겨서 이 여자가 뿅갔나? 정신차려라 현재야. 지금까지 미팅해서 상대가 날 몇번이나 일번으로 찍었는지 너는 알지 않느냐? 청담동거리의 가로수장식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어디를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그녀는 아무 말없이 날 따라왔다. 해지는 성탄절의 아쉬움 속에서 가로수의 주홍빛들이 물결처럼 길에 늘어져 있다. 아름답다. 비록 샹제리제 거리를 모방한 것이긴 하지만... 오늘도 사람들이 엄청 많구만. 많은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저번처럼 마냥 부럽지만은 않았다. 내옆에도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 하하. 하!하!하!. 그녀가 내 팔장을 꼈다. 오늘아침부터 그녀가 나한테 왜 이토록 친한척 할까? 기분은 날아가는 제트기도 잡을 수 있을거 같았지만 쑥스럽다. 긴장도 많이 되어서 표정도 굳었다. 무작정 빨리 걸었다. 내 걸음은 시속 십킬로미터다. 을지로3가 이호선과 삼호선 갈아 타는 곳, 그 긴복도에서 날 따라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빠른 걸음으로 앞만보고 걸었다. 옆이 썰렁하다. 뒤돌아 보니 그녀가 따라오다 말고 웃고 있었다. 아까처럼 팔장은 끼고 있지 않지만 행복하게 길을 걸었다. 북적거리는 거리를 지나 고급옷 가게들이 즐비한 그때 내가 인상깊게 본 쇼윈도가 있던 길을 걷고 있다. 이제 얼마 안있어 그곳이 눈에 들어오리라. 이제 거리는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고 아까 본 가로수의 장식등보 다 몇백배나 큰 나트륨등이 뛰엄뛰엄 불을 밝히고 있다. 그녀가 그 쇼윈도우 앞에 섰다. 그때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마네킨의 얼굴은 한곳만 주시한채 무표정이다. 혜지씨가 한참동안이나 그 마네킨을 보고 있다. 그 옆에 난 조금 쑥스러운듯이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둘의 모습은 결혼을 곧 앞두고 신부의 결혼예복을 보러온 듯한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면 따라오겠지. 난 걸을려고 했다. 순간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많이도 놀랐다. 떨리는 내 손의 느낌이 그녀에게 전해진 것도 같았지만 그녀의 손은 차분했다. 또 난 어색한 느낌이다. 손을 뗄려고 했으나 그녀는 놓아주지 않았다. 내 손보다 하얗고 내 손보다 많이도 작은 그녀의 한손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의 느낌은 예전에 닿았던 두손가락의 느낌처럼 마냥 따뜻했다. 심봤다. 나는 지금 쇼윈도 안보다 더 밝은 가로등 불빛에 어렴풋이 반사되어지는 쇼윈도 창의 혜지씨를 보고 있다. 그 옆에 서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비추어진다. 올해의 성탄절은 지금 울리고 있는 캐롤처럼 내맘에 오래도록 울려퍼질 것 같다. 그녀를 집앞까지 데려다 주면서 걸었던 골목길은 깜깜했지만 겨울같지 않았다. 내 자취방이 내 마음처럼 끓고 있다. 더울정도로... 아무것도 덮지를 않고 잤다. 단지 그녀가 준 목도리만을 목에다 감고 잤다. 잘못하면 질식사할뻔 했다. 일어났더니 그 목도리는 무의식중에 내 배로 옮겨가 덮여져 있었다. 이 방 보일러는 항상 새벽이 되면 꺼진다. 춥다. 가슴떨리게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지나갔다. 집에 안 내려가길 진짜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