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생: 후. 녀석이 지금 떨고 있다. 그럴만도 하지. 녀석은 지금 이 고비를 못넘긴다면 오늘 나의 상태로 봐서 이걸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있는 것이다. "빨랑 쳐 섀꺄." 공은 적구를 살짝 벗어나 다이의 꼭지점에 가 안겼다. 난 노란공을 힘껏 쳤다. 공이 시원스레 다이를 한바퀴 돌고 오더니 적구를 스쳐 녀석이 박아 놓은 흰공을 사정없이 때렸다. "푸하하. 드디어 이겼다." 최근 몇달동안 녀석을 이겨본적이 있던가? 가방에서 액자를 꺼냈다. "야. 너도 와서 감상해." "너 이거. 합성한거지?" "너같이 의심많은 놈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통일이 안되는거야 임마." "그래도, 개과 촌놈주제에..." 백수아가씨: 후. 녀석이 지금 떨고 있다. 그럴만도 하지. 녀석은 지금 이 문제를 못푼다면 옆에서 문제를 다풀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현주한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현주는 국어는 잘 못하는데, 영어는 오히려 철민이보다 낫다. 둘이서 별말은 안하지만 눈치보고 눈싸움하고 어쩌다 오늘처럼 누구는 풀었는데 누구는 못푸는 일이 생기면 의기양양하거나 의기소침하는 일이 벌어진다. 두 녀석들 하는 짓이 귀엽다. 현주 얘기를 들어보면 일년이상 학교 등하교시 자기가 타고 가는 버스에 철민이 녀석이 보였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는 일부러 자기가 타는 시간에 맞추어 타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현재 그녀석도 만화방에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보러 왔던거 같다. 만화방총각: 오랜만이다. 만화방에 먼지가 많이 내려 앉아 있군. 이 만화방도 이번달이 지나면 작별이구나. 역시... 가출이란 효과가 있단 말씀이야. 그럼 내가 누군데 삼대독잔데... 혜지씨한테는 참 미안하다. 만화방이 열린걸 보면 한번쯤 찾아 오겠지. 단골 그녀석도 보고 싶다. 오늘 그동안 못받은 신간도 받고 청소도 해야하고 할일이 많겠다. 자취생: 액자의 사진을 광고하고 다니느라 좀 바빴다. 음 놀랐을거다. 이런걸 보고 금의환향이라고 하는거다. 하하. 집에 어머니 옆에 누워 음악을 들었다. 우리집에는 8년정도 된 아주 고급오디오가 있다. 내키보다 훨씬 길다. 소리빵빵하지. 없는 기능 없지. 단점이라면 요즘 오디오처럼 조작이 간편하지 않다는 거다. 저걸 왜 샀을까? 저거 작동할 줄 아는 사람은 나뿐이걸랑. 내가 서울가고 나면 저건 그냥 장식품에 불과할 뿐이었다. "어머니." "왜그러느냐?" "음악이 듣기 좋죠?" "그렇구나. 비싼거라 틀리긴 틀리구나." "나 장가가서 여기서 살까. 음악틀어주게." "그래 너도 조금 있으면 장가를 가야지." "보내주게?" "갈려면 그래도 반듯한 직장이나, 뭐 해놓은게 있어야 되지 않겠니?" "그거 있으면 보내주게요?" "아직은 이르지 않나? 아홉수는 가는게 아니고 그렇다고 서른살은 조금 늦고..." "스무여덟살은?" "그러고보니 내년이네... 세월이 참 빠르다. 내 아들이 벌써 장가 갈 나이가 다됐으니..." 백수아가씨: 왜 한동안 잠잠하나 했어. 우리 엄마 새해 되니 나 시집보낼려고 안달이 나셨다. "내 친구중에 말숙이 아줌마라고 알지?" "응. 알아요." "그집 사촌중에 이번에 고시패스한 사람이 있대. 선한번 봐라." "싫어요." "그럼. 김교장님 알지?" "아빠 대학 선배님이시라는 분?" "응. 그분 아들이 레지던트잖아. 선한번 봐라." "싫은데..." "야이 지지배야. 니가 뭐 잘났다고 튕기냐. 너도 이제 스물일곱이다. 내년부터는 쳐다도 안봐." 치... 엄마는 그사람 성격은 어떤지. 착하고 성실한지 아니면 대인관계가 어떠해서 부인될 사람한테 잘할 것 같다라던지 이런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그저 고시 패스했다느니. 의사다느니, 아니면 아버지가 누구다느니 이런말 뿐이시구나. 그래 나도 사람인데 결혼할 사람의 배경을 따지게 되겠지. 하지만 아직은 싫다. "어디 착한 사람은 없어?" "착한사람?" "그 있잖아, 엄마 물통들어주던 그사람. 착하다며?" "그 학생을 내가 어떻게 아냐? 그리고 착한게 밥먹여 주냐?" "참 엄마두. 양심이 있어라." "근데 갑자기 그 학생 얘기는 왜 나오냐?" "그냥." 만화방총각: 정경이는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정경이를 보시더니 참한것 같다고 하셨다. 역시 아버지는 내편이시다. 어머니는 아직도 좀 못마땅하시지만 앞으로 좋아지시겠지. 너무 서둔게 아닌지 모르겠다. 어제 만화방문을 열었건만 아직 혜지씨도 그 단골 녀석도 나타나지 않았다. 청첩장도 주고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도 보여주고 싶은데... 자취생: 내일이면 올라가야 겠다. 오늘은 아버지가 차도 안가지고 나가셨다. 헨드폰도 그대로 있네. 잘됐다. 드라이버나 해야지. 용이와 그녀석 애인을 태우고 근처 호수의 한적한 커피숍 갔다. 저 두녀석이 참 부러웠었는데 이제는 뭐 나도 만나는 사람이 있다. 띠리리릭... 얼라리요? 헨드폰이 울리네. 혹시 차가지고 나갔다고 우리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신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시오." "혹시 현재 아닌가요?" 낯이 익은 서울말이다. "맞는데요." "저에요. 최" "어? 어떻게... 이번호를 알고?" "호호 집에다 전화를 했더니 어머님께서 가르쳐주시던걸요." "아 예. 그랬군요." "차가지고 나갔다면서요?" "잠깐만요. 그럼 집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아... 참 그것도 안가르쳐 주었지. 내가 어떻게 알았더라? 그냥 아는 수가 있어요." "그래요? 그럼 그런가보죠 뭐. 근데 왠일이에요?" "그냥. 언제쯤 올라오나 해서요." "예. 내일 올라갈거에요." "그래요? 그럼 올라와서 꼭 삐삐치세요." "그래요. 올라가서 보도록 할께요." 용이 녀석이 날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사진속의 여자냐라고 물었다. 당근이지. 니 애인이라면서 존댓말이냐라며 지금까지 구라친거라며 침을 튀긴다. "존댓말 하면 안되냐? 씨. 그리고 가끔 그녀가 나한테 반말도 해." 그런데 우리고향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자취방 전화번호를 대고 내이름 추적하면 여기 전화번호가 나오나? 궁금증이 생겼지만 그 궁금증보다 여기까지 전화를 다해준 그녀가 참 사랑스럽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하. 우쒸. 또 긁어 먹었다. 백하다가 사이드미러에 보이지도 않게 누가 버려놓은 고장난 티비에 긁혔다. 아버지 이번에는 뒷범퍼 밑입니다. 백수아가씨: 선보라고 했을때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었다. 한때나마 내가 결혼상대로 녀석을 생각한게 후회스럽다. 어떻게 내려간지 나흘이 지났건만 삐삐한통 안치냐? 녀석 집에다 전화를 해보았다. 집전화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안녕하세요. 저 현재 서울친군데요." "어. 그래." "현재는 어디 나갔나요?" "그놈? 우리아들? 그놈이 지애비차를 끌고 나가버렸네." "그래요." "바쁜일이면 헨드폰번호 가르쳐주까? 이놈이 헨드폰도 같이 가지고 나갔네." "예.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받아 적어. ***-***-****" "예 ***-***-**** 맞나요?" "맞어. 전화해가지고 차 빨리 가지고 들어오라고 전해줘. 또 긁어놓으면 지애비가 가만 안둔다고 했거든..." "예... 그럼 안녕히 계세요." 쿠. 베스트 드라이버라면서? 만화방총각: 오늘로 만화방을 다시 연지 사흘째가 되었건만 혜지씨하고 그 단골녀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늘은 오후에 정경이 부모님 만나뵈러가야되는데... 자취생: 드디어 내일이면 올라가는구나. 이번에도 어머니는 많은걸 싸놓으셨다. 하지만 겨울 옷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저번보다는 짐이 많지 않을거 같다. 집에 내려와서 항상 다시 올라갈 전날은 마음이 울적했는데 오늘은 뭐 그렇지도 않다. 앨범도 꺼내 보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사진만 한번씩 쳐다보고 히죽 웃기만 했었다. 아. 맞다. 그녀가 나한테 조금 오래된 사진을 한장 부탁했었지. 멋있다. 초등학교 졸업식때 찍은 사진이다. 뒤로 학교 정경이 펼쳐져 있고 소년이 좀 어색하게 웃고는 있지만 멋있다. 근데 왜 그녀는 요즘 사진이 아니라 오래된 사진을 원했을까 ? 지금 내모습이 좀 보기 그런가 ? 우리 어머니께서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생겼다고 그러시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올라갈 준비를 했다. 출근하시는 아버지차를 얻어타야하기 때문이다. 밝은 모습의 우리 아버지 "열심히 해라." 그말 뿐이시다. 아직 긁어놓은게 발각되지 않았다. 상자하나만 어깨이 이고, 가방하나만 들었다. 가뿐하다. 만화방을 지나쳐 내 자취방이 얼마 안있어 나타날것이다. 어라? 만화방이 문을 열었네? 백수아가씨: 아침에 자동차학원을 다녀오다가 수퍼에 갈일이 있었다. 오늘 현재가 올라온다. 쬐금 보고싶다. 그래 많이 보고 싶다. 어라? 만화방이 영업을 한다. 당연히 들어가 보았다. 한달만에 보는거 같다. 이병씨의 모습을... 그가 참 반갑게 날 맞이했다. 그의 모습은 별로 변한게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어디 가셨었어요?" "예. 이곳저곳 여행을 좀 했었지요." "외국이라도 나가셨어요." "아니요. 그냥 우리나라 안가본 도시들 몇군데 둘러 봤어요. 나중에 사진보여드릴께요." "그랬군요. 하여간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워요." "하하. 근데 조금 있으면 이 만화방 딴사람에게 넘길거에요.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뭔데요? 청첩장?" "하하 나 조금있으면 결혼해요." 권정경이라... 공책에 쓰여있던 여자의 이름이다. "아.. 그때 만화방 오셨던 그분이군요." "예. 좀 힘들었죠. " "축하해요." "그 라면 끓이던 친구분은 어디 가셨나? 3일전에 만화방문을 열었는데 안보이네요." "아. 고향내려갔어요." "그래 말투에 약간 사투리가 섞이더니만 어디 사람이래요?" "진주사람..." "친구분이 맞나봐요. 아닌가 했는데... 진주라..." "예 친구 맞아요. " "가만 진주면... 이번에 여행할때 진주도 갔었어요. 살기좋은 곳이더군요." "예..." 이병씨가 결혼한댄다. 조금 부럽다. 그리고 조금있어 만화방을 떠난다니 아쉽기도 하다. 만화방총각: 점심무렵에 혜지씨가 만화방을 찾아왔다. 반가웠다.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밝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 물론 내가 결혼한다는 얘기도... "참 내일 정경이 하고 결혼예복 보러갈건데 같이 안갈래요?" "제가 왜요?" "혜지씨도 나이가 곧 결혼할 나이잖아요. 예복같은거 미리 봐두면 좋을까 해서요. 그리고 저번에 정경이하고 서먹한거 같아서 소개도 시켜주고 싶어서요. 그때 아직 죄송한 마음이 남아 있어서. 식사라도 같이하면 좋잖아요." "흠... 그래도... 그리고 뭐가 죄송한지?" "아... 아니에요. 같이 안 가실래요?" 그러던 차에 단골녀석이 어깨에 박스를 매고 들어왔다. 지금까지 만화방 온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은 짐을 지고 온 손님의 모습이었다. 자취생: 집에 짐을 갔다놓고 가볼까? 아니면 그냥 지금 한번 들어가 볼까? 다시 나오기 귀찮은데 지금 들어가보자. 어라? 혜지씨도 있네. 하하 바로 들어오길 잘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예. 참 혜지씨 혼자가기 그러시다면 친구분하고 같이 가시면 되겠다. 저도 자랑도 좀 하고..." 뭔 얘기 하는거야? "그럴까요? 현재씨 내일 안바쁘죠?" 씨 내가 왔는데 반갑다는 말도 없이 내일 안바쁘다니... "뭐가요?" "하하. 이름이 현재였군요. 현재군 이거 하나 받으세요." 청첩장? 그럼 장가갈려고 지금까지 문을 안열었단 말이야? "그럼 내일 다시 올께요. 가요 현재씨." "예. 정경이가 내일 여기로 올거에요. 점심때쯤에 오면 될거에요." 뭔말인지...? 어깨에 있던 박스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혜지씨 손에 이끌려 다시 나오고 말았다.